19세기말 혼돈의 프랑스를 드러낸다. 낭만주의를 넘어선 자연주의의 물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자연주의를 계승하는 대신 해체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물결, 그 속에서 솟아나는 자본주의의 폐해. 귀족계급은 몰락했고, 부르주아들이 돈을 거머쥐로 원하는 것을 이루는 시대. 고전의 질서와 종교의 권위는 퇴색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혼란이 마치 돌연변이처럼 피어나던 시기. 어쩌면 그로테스크와 탐미주의의 씨앗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히 자연주의는 아니다. 돌연변이다.
위스망스의 작품 '저 아래(La-bas)'는 독자들로 하여금 손가락으로 어느 지점을 향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어느 위'도 있다는 뜻이다. 종교와 질서의 고전적 가치관이 자리 잡은 곳은 위에 있고, 주술과 타락의 소굴은 아래에 있다. 위스망스는 위에 머물고 싶은 주인공이고,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에 염증을 느낀다.
19세기말의 프랑스가 그랬다고 한다. 하긴 우리야 뭐 안 그랬는가. 우리는 나라 전체가 와리가리 했으니 더욱 심했겠지. 프랑스혁명 이후 산업혁명의 여파로 완전히 뒤바뀐 신분질서와 사회경제체계는 유럽 모든 국가의 혼란을 야기하기에 충분했으리라. 1900년을 전후한 영국 공장 노동자층의 사진들과 영상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신분의 대변혁이었다. 자본의 등장은 여러 가지를 뒤바꾸어 놓았다.
맙소사, 얼마나 엉망진창인가! 그런데도 19세기는 흥분해서 자화자찬하고 있잖아! 입만 열면 진보를 부르짖지. 그런데 누구의 진보인지? 무엇이 진보했다는 거야? 이 보잘것없는 세기는 대단한 걸 발명하지도 못했잖아!
샤를 7세 시대의 '질 드레'의 악행을 소재로, 위스망스는 악마성의 근원을 해부한다. 그것은 능력과 힘으로 원하는 목적을 이룬 존재의 또 다른 '변이' 같은 것이다. 질 드레는 잔다르크와 같이 100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영웅이 되었지만,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다른 욕구의 창구로 배설했다. 그의 악행은 훗날 사드후작과 자허 마조흐, 오스카 와일드 등으로 이어지는 쾌락과 탐미의 영역을 만들었지만 위스망스는 이를 고발하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확연한 퇴폐미와 관능, 쾌락과 탐미의 기운이 엿보이는 건 왜일까. 이러한 감정은 일단 위스망스가 이 작품 이후로 카톨릭계에 귀의했다는 사실로써 가라앉는다.
이 작품은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이 갖는 환상과 공포심을 떠올리게 한다. 2023년이 되어가는 지금 이 시기에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사이비교리와 교단들이 수만 명씩 되는 사람들을 포섭하여 무섭게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수백 년 전의 광신적 악마성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된다.
열광적 신비주의와 과격한 악마숭배는 백지 한 장 차이라네, 저승에서는 둘이 서로 맞닿아 있지
위스망스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나로서는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을 때와 동일한 박진감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 만연하던 여러 가지 미신과 이단종교에 대한 작가의 확고한 논리, 그리고 미술과 과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또한 사람들의 원초적 정서와 신비주의의 본질을 파고드는 집요함이 책을 읽는 내내 속도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들었다. 오래간만에 영화를 보는 듯한 작품을 접했다.
오스카 와일드가 극찬하고 미시마 유키오가 탐독했다고 하는, 아주 매혹적인 독사 같은 작품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