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하프타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verback Jun 08. 2024

가죽노트커버

아주 오래전, 맘에 드는 가죽 노트커버를 하나 샀더랬다

염소 표피로 만들어진 그 커버는,

소가죽과는 달리 표면이 매우 하얗고 부드러웠다

새로운 물건을 살 때의 설렘과 만족감이 풍부했다.


염소가죽이라는 것은,

사용감과 햇빛 노출에 따라 색이 점점 깊어진다기에

나는 정성스럽게 태닝을 시켜주고 관리하였다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을 찾아서

옥상에 올라가 널어두고

혹시라도 비가 올 것 같으면 가져오고를 반복했다


그런데 이 가죽은 워낙에 민감한 녀석이라

커피를 흘린다든지

어디에 긁힌다든지

혹은 물방울이 조금만 묻어도

보기 싫은 자국이 진하게 남았다


연분홍 밝은 표면에 남은 이상한 얼룩들은

항상 찝찝하게 보였고

나는 그 가죽에 대한 애정을 잃어갔다

처음 구매할 때의 들뜬 마음이 완전히 사그라든 채

책상 서랍에 처박아두고 몇 년을 그냥 잊어버렸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도 먹고

마음의 날카로움 같은 것도 조금씩 무뎌질 무렵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져서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노트를 하나 마련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오랫동안 쓰고 있지 않던 그 가죽커버가 떠올랐다

어차피 방치되어 있던 것이니 그냥 두지 말고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새로 구입한 노트에 끼워서 들고 다녔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먼지색처럼 변해버린

오래된 친구를 무심하게 바라보면서

대수롭지 않은 물건을 다루듯

휴대하면서 열심히 노트하고 메모하고 읽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 업무 중에,

그 커버에 커피를 흘리는 일이 또 발생했다.

급하게 물티슈를 꺼내어 박박 문지르는 그 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오래전 일들이 기억났다

아, 이 녀석은 원래 민감한 녀석이었지

이러한 자국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데...

이거 들고 다니지 못할 같다....

그냥 버리거나 다시 처박아두어야 할 것 같다.....

불편한 마음들이 다시금 마음속에서 스며 나왔고

나는 자꾸 오염된 부분을 쳐다보게 된다.

못생긴 표면,

더러운 얼룩

조금만 실수해도 영락없이 남기는 흔적

아 짜증이네......


이러한 마음을 간직한 채,

나는 못난 가죽을 가방에 넣고 집으로 퇴근했다.

그런데, 웬걸

가방을 열어보니

그 가죽커버의 커피 얼룩들이

묘하게 블러처리되어

표면 전체에 은근하게 스며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경계의 선들은 뭉개져있고

바탕과 오염의 컬러들은 서로 상쇄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환상을 본 것처럼

하루 만에, 녀석은 고통을 흡수해 버린 듯했다


생각해 보니, 이 가죽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가지고 있던

그 민감성과 밝은 피부 톤을 중화시켰으리라

공기나 습기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단단하고 관용성이 좋은 피부를 스스로 만든 것이다


집착하고 애정을 갖고 혹독하게 바라보았을 때에는

오로지 단점과 오점만 보였는데,

정서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무심하게 대하고 나니

어느덧,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 중화시키는 연륜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그 녀석을 애지중지 다루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더욱 자연스럽게,

아무런 걱정 없이 아무 곳에나 넣고 다니면서 사용하였고

커피가 쏟아지건, 물기가 묻건 걱정하지 않고

그냥 손으로 털어내면서

마치 나의 손바닥과 일체화 된 느낌으로

일상 속에 포함시켰다.


십수 년이 지나도록 나의 손때가 묻은 이 녀석은

이제 짙은 커피 그 자체가 된 듯하다

무엇이 묻어도, 어떠한 상처가 나도

무엇이든지 흡수하고 중화시켜

그 바탕의 색과 혼연일체가 되도록 만들어버린다

처음 구매하였을 때의

그 창백하고 새하얀 모습은 사라지고

완전히 깊고 노련한 브라운을 습득하여,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표면으로 멋지게 남아있다

어쩌면 이것이 가죽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비단 가죽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

집착, 걱정, 미련,

완벽을 추구하는 정서,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냉정,

인간의 마음속에 모두 자리하는 것들이다.


이 손바닥만 한 가죽의 오랜 투쟁을 지켜보면서

나는 마땅히 사람이 가져야 할

관용의 정서

미움에 매달리지 않는 마음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오랫동안 지켜보는 인내와

무엇이든 끌어안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포용의 기품을 깨닫게 된다.


작은 소품 하나에서도 인생을 느낄 수 있다면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밤 벚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