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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진화가 (幻想進化歌) 3

짝짓기

by 은림

내가 연구소에 딸린 강의 별채를 나왔을 때, 정문 앞에 이미 택시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부른 적도 없지만, 지시표에 선명하게 재생체 식별 번호와 내 이름이 깜박이고 있었다. 거기다 경망스럽고 거치적대는 리본과 꽃장식이란! 나는 따질 기운을 잃고 뒷자리에 털썩 올라탔다. 두말 할 거 없이 나를 마중 나온 허니문 카였다. 허니문이란 말도 결혼 제도가 사라진 뒤부터는 전혀 쓸모없는 단어가 되었지만, 과거에 향수를 느끼는 노땅들의 악취미란 어떻게 말리래도 말릴 수가 없는 모양이다.


<인식코드 다40뷰1216열4밤 창. 귀하께서는 짝이 있는 ‘ㅅ’ 구역의 ‘ㅂ’시로 이동하시게 됩니다. 예상 소요 시간은 03:23:48이며 도착 시간은 17:48:23입니다. 쾌적한 컨디션을 위한 캡슐 샤워와 수면 및 식사 서비스가 제공됩니다. 부디 평안한 시간 되십시오.>


나는 냉장고의 메뉴를 확인하고 달걀처럼 생긴 캡슐 욕조에 앉아 분무되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짝짓기를 위한 목적이라는 것만 빼면 억만장자 부럽지 않을 만큼 나무랄 데 없는 서비스다. 짝짓기 성공률이 지나치게 낮고, 직업이나 상황 때문에 지역과 도시를 넘나들어야 했으므로 사람들은 서로 만나는 것만으로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돈이 들었다. 국가에서는 짝짓기를 장려-내가 보기엔 강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서비스를 만들어냈다. 허니문 카도 그중 하나다.


나는 준비된 턱시도-뭐냐 대체, 이런 구식 옷을 입고 작업을 걸라고? 성공할 것도 안 되겠다-는 거들떠보지 않고 분자 분리 방식을 사용하는 초소형 즉석 세탁기에 옷을 넣으며 툴툴댔다. 분자 분리 방식 세탁기는 옷마다 달려 있는 고유의 형태와 구성 분석표를 기준으로 옷을 일시적으로 분해해 고유 성분 외의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다시 재구성하여 내보내는데, 세제도 물도 필요 없이 새 옷이나 다름없어지므로 대단히 각광받았지만 나처럼 편하게 낡아지는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젬병이었다. 아마 강도 이 물건을 쓰지 않으리라.


샤워 캡슐 옆 선반엔 남성용 화장품은 물론 향수도 여러 가지 구비되어 있었는데 연희라는 여자의 취향이라고 일부러 추천된 것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뿌리지 않았다. 플랜 헌터는 냄새가 없어야 한다.


<전화가 왔습니다. 받아보시겠습니까?>


나는 식별 코드를 확인하고 받겠다는 사인을 했다. 그러자 얌전한 중년 여자의 옷을 입은 정(情)이 내 곁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안녕, 창? 잘 있었니?>


30대의 세련된 직장 여성의 우아함과 섹시함을 고루 갖춘 그녀는 나를 만든 교미쌍의 네 번째 재생체다. 나는 그녀가 왜 전화를 했는지 알고 있었다.


<오늘 중요한 날이지? 좋은 시간 보내라고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단다.>


그때 갑자기 차가 중앙에서 우회로로 빠지더니 좁은 골목 앞에서 멈춰 섰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창이 열리고 작은 상자와 수령증이 문틈으로 디밀어졌다. 상자 안에는 탐욕스럽도록 빨간 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이게 그녀의 ‘친절 방식’이었다. 제멋대로 줘놓고, 요구하지도 않은 친절에 대한 대가를 받아 간다. 매번 당하는 내가 멍청한 거겠지만.


<그럼 잘 부탁해. 귀여운, 아주 귀여운 노래꾼을 부탁한다.>


“누구 맘대로.”


실컷 투덜댔지만 이미 그녀는 자기 이야기에 푹 빠져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지리멸렬한 그녀의 잔소리가 이어지건 말건 간에 시트를 당겨 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한결 나았다.


정은 이미 오래전에 난자가 고갈됐다. 그녀가 수태한 여덟 번째 번식체는 재생부적격체로 성장체까지만 간신히 버티고 폐기되었다. 정에겐 그게 마지막 수태였다. 그러나 번식에 대한 그녀의 야심은 끝이 없어서 자신이 불가능해지자 번식체들의 수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도대체 왜 그녀가 그렇게 번식에 연연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죽음은 사라졌다. 영원한 소멸도, 이별도 없다. 굳이 불안정한 다음 개체에 자신의 일부를 저장하지 않아도 훨씬 더 완벽하고 효율적으로 자신을 존속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넘치는 인생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바빴고 목숨을 걸었던 모든 위험한 일들은 최고의 스릴 이상 어떤 의미도 갖지 않게 되었다-헌터를 제외하고-. 그게 32세기다.


<뭐라고?>


정의 안색이 굳어졌다. 머릿속에 뛰어다니던 질문이 결국 입 밖으로 뛰어나간 모양이다.

“왜 그렇게 번식에 집착하냐구요. 당신이 우리를 만들었지만 우리가 당신 소유물은 아니잖습니까.”


<창, 나는 그저 네가 잘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게 아닐 겁니다. 유명한 의학자, 교수, 사법관, 과학자, 플랜헌터, 그래요, 거기에 딱 하나만 더 넣으면 완벽하겠지요. 유명한 연예인. 그거 압니까? 그들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그냥 평범한 여자일 뿐이니까.”


갑자기 정의 홀로그래피가 쑥 사라졌다. 기분은 찜찜했지만 마음은 훨씬 가벼웠다. 나는 내 공격에 정이 해야 할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깨닫기 전에 알려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백 번 재생하더라도 그녀는 결코 답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도착했습니다.>


너무나 완벽해서 껄끄러운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어느새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원하신 대로 뒷문입니다. 직진으로 108미터 앞이 율연희 씨의 자택입니다.>


택시에서 내리자 컴컴한 숲과 습윤한 공기가 나를 맞았다. 돔의 쾌적한 공기를 위해 조성된 인공 숲이었다. 이 정도면 플랜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인공 숲이 없으면 돔이 죽고, 인공 숲이 있으면 플랜이 산다, 이게 딜레마였다.


나는 경계심을 곧추 세웠다가 갑자기 피식 새어나온 웃음 때문에 긴장이 달아났다. 짝짓기 휴가 기간이라 광선총은 반납 상태인 데다가 한 손에 쪼그만 케이크 상자를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헌터라니, 맛있게 잡아먹혀도 웃어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곧 웃음기가 싹 가셔버렸다.


“어디가 직선거리냐!”


어이없게도 멍청한 기계 뇌가 가운데 숲을 계산에 넣지 않고 직선 측정으로 나를 내려준 것이다. 기가 막혔다. 주변엔 희미한 미등 외엔 인적도 없었다. 택시는 이미 부유 도로를 타버렸고, 길이 없는 숲을 지나갈 차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하면서 숲길을 헤치고 들어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터라 생체컴퓨터로 다른 택시를 부를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싫은 일을 하러 가는데 이렇게 수고로워야 하다니, 짝짓기가 끝나면 <돔>에 대고 화끈하게 풀어줄 테다. 아니, 넷으로 운송 회사를 걸고넘어지면 회사 측에서 알아서 돔을 물고 늘어져주겠지. 개인이 상대하는 것보다 그 편이 낫겠다. 그리고 또……


그때 뭔가가 휙 내 손에서 케이크 상자를 낚아채 갔다.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누구냐?”


‘히힛’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사사삭’ 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지만 이쪽은 헌터라고.


“거기 못 서!”


손끝에 잡힐 듯하던 조그만 것이 나무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 뭔가 툭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빈 케이크 상자였다. 위를 올려다보자 하얗게 흔들리는 작은 발이 보였다. 은색 단발머리를 한 조그만 계집애가 손과 입가에 온통 벌건 칠을 한 채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해맑은 미소에 갑자기 힘이 쭉 빠져버렸다.


“뭐냐, 너? 율가의 꼬마냐?”


계집애는 대꾸 없이 원숭이처럼 뛰어내려 온몸으로 내 뺨에 처덕 달라붙었다가 또 잽싸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향기처럼 흥얼대는 허밍 소리가 꽤 오랫동안 귓전에 남았다.

“쳇. 대대로 가수 집안이라더니.”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거울이 없이도 내 꼴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 수 있었고, 수건 하나로는 수복할 수 없었다.




“창…… 이세요? 안녕하시냐고 묻고 싶지만, 별로 그래 보이지 않네요.”


천신만고 끝에 숲을 가로질러 율가의 뒷문에 다다른 나를 본 연희의 첫 인사는 이랬다.


“오다가 말썽이 있었습니다.”


나는 케이크 시럽으로 끈적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정도론 어림도 없겠어요. 욕실을 안내해줄게요.”


연희가 걸걸하게 웃자 큰 몸이 웃음을 따라 출렁였다. 그녀는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여자였다. 유일하게 여성스런 점이라면 구슬처럼 크고 까만 눈이었는데, 흰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아서 무척 독특하고 순해 보였다.

“이쪽이에요.”


나는 널따란 욕조가 놓인 호사스런 샤워실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12세기에나 유행했을 법한 대리석 물건이었다. 나는 그 욕조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특별히 욕조 목욕까지 했다. 나와 보니 새 셔츠와 바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창 건 아직 세탁 중이에요. 얼룩이 잘 지지 않더라구요. 못 입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괜찮습니다.”


옷에는 희미하게 연꽃 향기가 배여 있었다. 좋아한다는 게 이런 종륜가? 취향이 나쁘진 않군.

연희는 나에게 편안한 자리와 술을 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꽤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거슬릴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내게 키스해 왔고 둔중한 다리가 내 허리에 감겨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본능에게 이성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도무지 행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난 반쯤 벌거벗은 상태에서 연희를 밀어내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난…… 난 못하겠어요.”


“내가, 너무 서둘렀나요?”


“그런 게 아닙니다.”


나는 고개 저었다. 연희는 몸을 떼고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내가 좀 별로죠? 괜찮아요, 솔직히 말해도.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그녀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난 많이 미안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내 문제예요.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이 얼마나 웃길지 알지만, 난 짝짓기에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비이성적이고 번거로운 방법을 써야만 하는 겁니까? 인공수정을 하는 편이 훨씬 편리하고 깔끔할 텐데.”


연희는 잠깐 생각한 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세균이 묻을까 봐 악수를 할 때도 항균 장갑을 애용하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살을 맞대라니 경악할 만하군요. 하지만 짝짓기가 인공수정보다 수태율이 15배가 높대요. 기형아도 방지할 수 있구요. 인공수정의 미세한 충격과 온도 변화만으로도 수정체는 심각한 손상을 입으니까요.”


“아닙니다 연희 씨, 내가 궁금해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다시 말을 잇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아무도 죽지 않는데 왜 새로운 인간이 필요한 겁니까?”


연희는 또 오래 생각했다. 난 약간 놀랐다. 강 외에 나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에 진지하게 대꾸해주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행이네요, 적어도 내가 싫었던 건 아니군요. 솔직히 유명세만 빼면 나 자신으로서는 별 볼일 없는 여자거든요. 물론, 자기 비하는 아녜요. 난 나로서 충분하니까. 단지, 매력적인 짝짓기 상대는 아니라는 걸 객관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에요. 아, 왜 외모를 옵션으로 안 했냐는 얼굴이네요. 직업적인 이유예요. 가수는 눈에 띄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보편적인 미모만 좇다가 오히려 개성을 잃을 수도 있거든요. 그건 뚱뚱한 거보다 더 나쁘죠. 아무튼, 당신이 말한 문제에 관해서는 난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좀 더 생각해보고 나중에 대답해줄게요. 그때까지도 듣고 싶다면.”


사이 띄기가 결코 없는 그녀의 말을 그래도 제대로 알아들은 건 순전히 정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정은 결코 중간에 말을 쉬는 법이 없었다.


“듣고 싶을 거 같습니다만.”


“그럼 여기 좀 있을래요? 빈집 관리인이 휴가를 냈거든요. 어차피 짝짓기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돔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 중일 테고 난 주말 동안은 공연 때문에 비울 테니까요. 지내기 불편하지는 않을 거예요.”


“좋습니다.”


연희는 필요한 걸 주문할 수 있도록 하드 컴퓨터를 빌려주었다. 이쪽이 생체컴퓨터보다 화면이 커서 쇼핑에 용이했다. 나는 간단한 옷 몇 벌과 세면도구, 기호품을 주문하고 별로 급하지 않은 메일 함을 어슬렁거렸다. 그때, 디링 소리와 함께 화상통화 연결창이 떠올랐다. 본의 아니게 사생활을 침해하게 된 나는 약간 당혹스런 기분을 느끼며 연희를 불렀다.


“연희 씨 전홥니다.”


막 욕실에서 나오던 연희는 느긋하게 머리를 말아 올렸다.


“내비둬요. 별로 중요한 건 아닐 테니까. 필요한 건 다 했어요?”


“예. 산책 좀 다녀올까 하는데, 괜찮습니까?”


“물론이죠. 아, 정원석 너머로는 가지 말세요. 돌본 지가 한참이라 엉망이거든요.”


나는 이미 한 번 거쳤다고 대꾸해주었다.


“아참, 당신 직업이 헌터랬죠? 김에 순찰이라도 돌아줄래요?”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연희가 말했다. 난 씩 웃었다.


“그럼 내게 노래해줄 겁니까?”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여자였다. 짝짓기를 빼고 생각한다면 더없이 즐거울 인연이다. 물론 짝짓기가 아니라면 절대 스칠 일도 없는 별천지의 사람이지만.


“생각해보죠.”


나는 문을 닫았다. 문득 문틈으로 보인 화상 화면이 어쩐지 낯익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몇백 년을 살았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 몇이나 있으랴 하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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