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
케이크 시럽을 닦아낸 뺨에 닿는 숲의 공기는 충분히 쾌적했다. 나는 발밑에 버석대는 흙을 킁킁대고 약간 맛보았다. 플랜이 사는 흔적은 없었다. 놈들은 사람을 주양분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변의 토양에 독특한 성분들이 결핍되거나 과밀하기 마련이었다. 노련한 헌터들은 플랜이 사는 흙이 늙은 사과처럼 달고 퍼석퍼석하다는 걸 안다. 이 흙은 촉촉하고 짙고 썼다.
톡……
그때 갑자기 눈바람이 휘몰아쳤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였다. 8월에 눈이라니, 아무리 세기말의 기후 대격변이 있었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사사사 쏴……
나는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리진 달은 휘영청 밝고 하늘은 바닷속처럼 깊고 파랬다. 눈은 마치 물속에 뿜어진 산호 알처럼 허공에서 반짝였다. 휘날린 눈이 뺨에도 입에도 달라붙어서 손바닥으로 쓸어내자, 어느새 잘게 찢은 종이 조각으로 변했다. 나는 굵은 조각 하나에서 내가 잃어버린 케이크 상자의 상표 일부를 발견했다. 얼굴을 들자 그 애가 보였다.
나무 등걸에 걸터앉은 그 애는 달처럼 동그란 얼굴에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휙 사라져 버렸다. 나는 장난기가 동했다. 잠깐 몸이나 풀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이미 두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숲을 유쾌하게 내달렸다. 어둠을 볼 수 있도록 미세하게 조작된 시신경 채널을 살짝 바꾸자 밤은 우물 속처럼 어두운 초록색으로, 모든 나무와 사물은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그 애는 날다람쥐처럼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며 이동했는데 어찌나 몸이 가볍고 재빠르던지 포대처럼 허술한 상의 끝자락만 간신히 쫓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번 나무에서 다음 나무까지는 뛰기에는 무리가 있다. 저기쯤이겠군.
“얍!”
‘여기다’라고 예상했던 곳에서 막 그 애의 옷자락을 잡으려는 찰나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쿠당’ 하는 느낌과 함께 황금 먼지가 사방에 피어올랐고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나는 대(大)자로 뻗어버렸다.
잠시 후, 정교한 사슬 목걸이가 스치는 것처럼 잘강거리는 웃음소리와 작은 숨결이 뺨에 닿았다. 그 애는 땀 냄새와 숲 향기가 뒤엉킨 묘하게 자극적이면서도 싱그러운 냄새를 풍겼다. 난 정신이 있었지만 그냥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조그맣고 새털처럼 부드러운 손가락이 나를 만졌다. 이마에서 뺨으로, 코를 한번 비틀어 쥐었다가 놓고 삐죽 튀어나온 턱 언저리를 지나 목젖에서 또 잠시 그릉대는가 싶더니 마침내 쇄골과 가슴팍 사이에 다다르자 한참 동안 떠나지 않았다. 내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는 진동을 즐기듯이.
나는 갑자기 와락 그 애를 끌어안았다. 그 애는 깜짝 놀라는 듯했지만 금방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애는 내 절반도 숨 가빠 하지 않았다.
어색한 기분에 슬그머니 팔에서 힘을 빼자 그 애는 물거품처럼, 요정처럼 순식간에 내 품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멀리 가진 않고 두어 걸음 물러난 정도였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멋쩍게 웃었다. 그 애는 말없이 나를 보다가 손을 흔들며 자기 입과 배를 가리키고 나를 가리켰다. 입 주변엔 아직 케이크 시럽이 묻어 있었다. 뭘 요구하는지는 뻔했다.
이런 시대에도 말을 못 하는 사람이 있나 싶다가 문득 사생아가 생각났다. 정식 등록되지 않은 짝짓기는 난소가 검열되지 않기 때문에 장애를 가진 수정체가 그대로 체내에 남게 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럴 경우 신고도 곤란하고 사출도 어려워서 미숙한 자궁에서 그냥 자라게 된다고 했다. 대부분이 적은 돈으로 뒷골목에서 제거됐지만 간혹 성공적(?)으로 성장체의 삶을 얻게 되기도 하는데, 그런 식으로 돔 밖에 버려진 체로 자란 기형체의 기사가 종종 넷에 오르곤 했다. 나는 짐승에 가까운 그들의 외설스런 외모에 혐오를 느끼기보다, 어림할 수도 없는 그들의 숫자가 플랜의 확산에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을지가 두려웠다. 다행히 이 애는 지나치게 가벼워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 외엔 외관상으로 큰 문제는 없어 뵌다. 근처에 수용시설이 있는 걸까?
“알았어.”
말하지 못하면 대개 듣지도 못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서 나는 목을 크게 끄덕이는 동작도 해 보였다. 그 애는 안심한 얼굴로 숲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숲 너머에 누가 사는지 혹시 압니까? 멀리서 골조가 보이던데.”
샤워 후 뜨거운 밀크 티를 홀짝이자 온몸이 다 노골노골해졌다. 연희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 저었다.
“난 몰라요. 검색해 보든지요.”
검색한다고 나올 것 같지는 않던데.
“뭔가 있더라도 아무도 살지 않을 거예요. 거긴 이미 오래전에 버려진 구시가지인 걸요. 왜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떤 담대한 꼬맹이가-어른일리는 없겠지- 그 숲을 쏘다니는 걸까? 플랜의 위험에 대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걸까?
“직업 정신 발휘 중인 거예요? 근방에서 플랜이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집중 분포 지역과도 꽤 떨어져 있구요. 여기 숲은 별로 깊지가 않아서 자생할 수도 없을걸요?”
어깨너머로 화면에 뜬 지도를 보고 연희가 말했다. 그녀는 아마 최근에 정원석을 넘어가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그곳은 이상 기후로 인해 밀림이라고 해도 어울릴 정도가 되어 있었다. 작년 연말 데이터만 해도 숲의 너비는 무척 미미했다. 여기에 기준 했다면 택시는 나를 잘못 내려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에 대고 시비를 걸기는 힘들겠군.
“창 전화예요~. 회선 전환해 줄게요!”
연희는 어제 바로 택배로 도착한 내 하드 컴퓨터로 회선을 전환했다. 어지간한 용건이라면 휴대전화를 걸 텐데 누구지? 라며 귓바퀴에 이어쉘(도청 방지용 화상통화 기구)를 장착하자 3차원 모니터에서 강의 초췌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창! 대단한 걸 알아냈어!>
난 깜짝 놀랐지만 그녀의 형형한 눈을 보고 잠시 걱정의 말을 접어 넣었다.
<아직 발표하진 않았지만 네게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어. 연구실에 있는 녀석의 조직과 일반 식물과의 조직 대조 작업이 이제 막 끝났는데, 플랜은 식물이 아니라 곰팡이였어. 정확히 말하면 진짜 곰팡이는 아니고 지의륜데 외부의 인간 의태 부분은 곰팡이고-그래서 피부 솜털이나 머리카락 촉감을 흉내 낼 수 있는 거였어- 엽록소를 포함하고 있는 내부의 근육-그걸 근육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이 영양공급을 맡고 서로 공생하는 거지.
큰 뿌리 때문에 식물인 줄 알고 너무 오래 헤맸지 뭐야, 이렇게 큰 곰팡이를 누가 상상했겠어? 엊그제 지하철 공기오염 문제 기사에서 인간이 살기 좋은 습도는 곰팡이도 살기 좋다는 말에 퍼뜩 생각이 들었는데 딱이더군! 이제 외계 생물 운운했던 과학자들 콧대를 꽉 눌러 줘야지. 아참, 그리고 이건 좀 개인적인 질문인데, 창이 지금까지 사냥하면서 혹시 플랜의 수컷형을 본 적 있어?>
나는 물처럼 쏟아지는 강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더듬더듬 답했다.
“글쎄요… 저희도 목숨 걸고 잡느라 바빠서요. 사냥이 끝나면 남는 건 광선총에 탄화 흔적뿐이거든요. 워낙에 생명력이 강해서 잿더미 속에서도 일부라도 남아 있으면 재생하기 때문에 짓밟느라 바쁘지 일일이 확인할 틈은 없습니다.”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들으니까 더 그런 거 같은데… 수컷형은 본 적이 없는 것 같군요. 만디가 기준이라면 말입니다.”
<응, 역시…. 아, 이건 아직 가설 중인 거니까 다음에 다시 말해 줄게.>
나는 복잡해진 미간 주름을 주물렀다.
“그나저나, 좀 실망인데요.”
강은 빙긋 웃었다.
<뭐가? 아, 외계 생물이 아닌 거? 어쩐지 기대하고 있는 거 같더라니. 하지만 난 지상의 생물인 게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걸.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정체 모를 외계의 것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것보다 기왕이면 같은 별에서 같이 케케묵은 대기를 마셔 온 쪽이 낫잖겠어.>
“그건 또 무슨 깨는 소립니까?”
<아, 그냥 개인적인 감상이야. 쉬는 기간인데 복잡한 소리 해서 미안해. 좋은 시간 보내라구~.>
“잠깐만요, 강.”
그러나 회선은 이미 끊겨 있었다.
“일이에요?”
연희가 의자 등에 달라붙었다.
“아뇨. 그냥 친굽니다.”
“꽤 어려운 얘길 하는 거 같던데요?”
“연희 씨는 일반인이니까요. 저도 당신이 노래 얘기하면서 하는 통화는 전혀 못 알아듣습니다. 중간에 말없이 노래만 하는 건 더 그렇구요.”
연희는 ‘흐응’하고 콧소리를 냈다. 나는 그게 그녀가 복잡하지만 별로 중요치 않은 설명을 피할 때의 버릇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플랜이라는 거, 정말 그렇게 위험한가요? 사진을 봤는데, 꽤 매혹적으로 보이던데요? 마치 과거의 환영을 현실로 불러들인 것 같았어요. 까마득한 전설 속 괴물이 부활한 거 같기도 하고, 화석에 살을 붙여 놓은 것처럼 원시적이면서도 직관적이고.”
나는 그녀의 표현이 과히 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약간 놀랐다. 흙에서 태어난, 사람을 빼닮은 생물. 그들이 먹는 건 현세 인간이고, 그들을 키운 건 까마득한 과거를 묻어온 퇴적층, 그 대지 위다.
“직접 만나면 그런 생각 안 들 겁니다. 동영상 없이 사진만 떠다니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유혹할 때야 근사하지만 잡아먹으려 들 때는 악몽이 따로 없습니다. 매번 내가 왜 이 짓에 나섰나 후회만 급급해지죠. 인간을 주식으로 한다는 점만으로도 플랜은 인간에게 충분히 위험한 존잽니다.
거기다 플랜에게 먹힌 사람은 재생되지도 않습니다. 그건 진짜 치명적이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먹이 피라미드의 꼭대기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먹이 피라미드는 미시적 관점으로는 단지 먹이 관계에 불과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는 종(種) 간의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줄줄이 흘러나온 내 말에 스스로가 놀랐다. 그제야, 내 안에 자리 잡았던 불안의 정체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이 지구의 새로운 지배자가 아닐까 하는 불안. 역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진화는 언제나 전(前) 세대에 치명적인 충격을 수반했다. 공룡에서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신인류 모두. 아니, 망상이 지나쳤다. 강에게 옮았군.
연희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끝까지 듣고 나서 불쑥 말했다.
“창, 과연 플랜만 사람을 먹을까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는 얼얼하게 충격이 가시려는 머리에 다시 몽둥이가 다가와 있는 것처럼 간질간질한 느낌을 받았다. 연희는 마치 미스터리 영화의 주인공처럼 말에 뜸을 들였다.
“글쎄요, 나도 방금 스쳐 간 건데… 제대로 말하려면 좀 정리해야 할거 같아요.”
“그래서요?”
“에? 정리가 필요하다니까요?”
“아직 안 됐습니까?”
연희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꽤 예민해져 있던 나는 그 갑작스런 웃음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창, 생각보다 성질 급하네요. 난 과학자가 아녜요. 이렇게 금방은 안 돼요. 시간이 필요하다구요. 우선 오늘 밤은 자야겠어요. 내일 일찍 K시로 떠야 하니까. 먼저 잘게요.”
“… 잘 자요.”
나는 떨떠름히 인사했다. 연희는 수면 시간이 정확했다. 자기 관리도 있겠지만 곧 노화에 들어가므로-외모 상으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심한 듯했다. 물론 그녀 정도의 부와 명성이라면 다음 재생 따위는 별로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아쉽다면 이번 생에서 번식체를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는 것 정도일까? 나는 그녀가 몇 번째 재생체인지 모르기 때문에 짝짓기에 얼마나 부담을 갖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