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믿을 수 없게도 내가 다시 눈을 뜬것은 연구소였다. 엷게 바랜 천장 색과 낯익은 인테리어로 나는 이곳이 강의 개인 연구실임을 알았다. 내 곁에는 미완이 서 있었다. 연희도 함께였다.
“어떻게 된 거지? 나 플랜한테 먹히지 않았나?”
내 심장은 아직 생생한 죽음의 충격으로 떨고 있었다.
“아, 음…. 다행히 맛보기 시작할 때 뺐었어요. 방법이 좀 거칠었지만.”
미완은 빈 손가락으로 총 쏘는 흉내를 낸 다음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에… 저… 플랜이 전부 먹어 치우기 전에 그냥 둘 다 쏠 수밖에 없었어요. 이해하세요.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거든요.”
나는 미완의 목소리가 묘하게 엇나가는 걸 느꼈다. 미완 탓이 아니라 내 귀 탓이었다. 오른쪽 귀가 없었다.
“음… 그러니까… 녀석이 당신의 귀를 물어뜯더군요. 그쪽엔 이미 플랜의 독이 퍼져서 재생하더라도 몸이랑 따로 놀 거라서…. 아… 음… 그래서 지금 인공형의 본을 뜨고 있어요. 곧 평소랑 똑같아질 거예요.”
“어떻게 된 건지 누가 설명 좀 해보시죠.”
나는 그런 설명에는 강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대신 미완이 답했다.
“에… 그게…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제가 당신을 구했어요. 어떻게 제가 거기 있었냐면… 음… 연희의 전 짝짓기 상대가 저였거든요. 저는 그전부터 이미 연희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정말 기뻐했는데, 실패로 끝나자 또 만날 길이 막막해졌죠. 흠… 제 월급으론 연희가 있는 곳까지의 편도 요금 밖에 안 됐어요. 그래도 있는 돈을 다 끌어 모아서 그녀의 모든 공연과 스케줄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죠. 에… 저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니까….”
나는 사랑이란 건 믿지 않지만 적어도 미완이 어떤 기분으로 그 일들을 했을지는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날 강의 온실에서 그렇게 나를 노려본 거였군.
“음… 아무튼… 당신은 운이 좋았어요. 당신이 숲으로 사라져 버렸을 때 마침 강이 근처에 있는 저를 불렀어요. 진짜… 타이밍이 좋았어요.”
나는 그때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강은 어딨습니까?”
“그게….”
미완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나는 속으로 차분히 최악의 일들을 상상했다. 이렇게 하면 어떤 일을 마주하건 간에 꽤 완충제 역할이 됐다.
“에… 창이 일어날 수 있게 되면 녹화 칩을 보여 드릴 생각이예요. 저도 제 눈을 믿기 어렵지만….”
나는 연희를 넘겨다보았다.
“당신은 봤습니까?”
연희는 고개 저었다.
“전 일반인인 걸요.”
나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봅시다.”
“잠깐, 창은 좀 더 쉬셔야…….”
“괜찮습니다.”
지금의 내 신경으로서는 이 불길한 긴장을 버텨 내는 것만으로 녹초가 될 지경이다. 매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먼저 맞는 편이 나았다.
미완은 나를 부축해 영상실로 인도했다. 영상실은 곤충 눈의 내부에서 밖을 보는 것처럼 한 번에 마흔여덟 개의 각도에서 자료를 살펴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저… 미리 말씀드리지만… 녹화 상태가 조악해요. 전파 장애라도 있었는지 중간에 3분 정도 노이즈만 나올 거예요. 다른 카메라를 확인해 봤는데 연구동 전부, 아니 돔 전체가 시스템 다운을 일으켰더군요.”
나는 미완의 설명을 제대로 들으려 노력했지만, 미간에 땀만 맺힐 뿐이었다.
“흠… 혼자 계시는 게 나을 거 같네요.”
그는 컴퓨터에 필름 칩을 투입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잠시 후 나는 온실에 서 있는 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잠옷인지 작업복인지 구분 불가능한 꾸깃한 흰옷은 분명 내가 통신기를 집어던지고 숲으로 달려간 그날 밤의 것이었다. 나는 화면 하단에 뜨는 녹화 시간으로 그게 강이 나와의 통화를 끊은 직후라는 걸 알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너?>
혼자 있는 강은, 마치 사람에게 하는 듯이 플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눈을 감고 하늘거리며 플랜은 물 밖에 나온 붕어처럼 입을 뻐끔댔다. 성대가 없어서 입을 움직인다는 건 별 의미가 없었지만 놈들은 일부러 인간 흉내를 내고 있었다. 나는 묘한 동정심과 함께 찜찜함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해서 놈들이 얻고자 하는 게 무얼까? 그들은 왜 우리와 소통하려 하는 걸까? 강의 말처럼 놈들이 우리를 닮은 건 단순한 사냥의 미끼 차원이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이유가 있는 거였을까?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원숭이와 고릴라만큼 유전적 구조가 다름에도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어느 한 접점에서 서로 소통했던 것처럼-그게 대립이건 친화건 간에-.
나는 숨을 죽였다. 만약에 그렇다면 대체 왜, 어떤 이유인지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화면밖에 남지 않았다.
화면 속의 강은 홀린 듯이 플랜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화면에서 이명 같은 것이 들렸다. 나는 스피커 볼륨을 높였다. 노이즈가 심했지만 이명이 아니라 분명 노랫소리였다. 놈이, 플랜이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음조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너 지금…>
강은 플랜에게 가까이,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놈은 강을 현혹하고 있었다. 분명했다.
“들으면 안 돼요, 강. 들으면 녀석이 당신을….”
나는 숨을 삼켰다. 놈이 강을 잡아먹을 거라는 예상은 다행히 빗나갔다. 강은 흔들리면서 천천히 플랜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플랜에게 다가갔다.
<그래. 좋아. 나쁘지 않네.>
강은 팔을 펼쳤고, 플랜은 그녀를 허공으로 안아 올렸다. 거기서부터는 카메라 밖이라서 보이지 않지만 희미하게 쥐어뜯기는 소리와 화면 안으로 툭툭 떨어지는 고깃덩이-이전에 강이었던 조각-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강을 먹으면서도 플랜은 노래하고 있었다. 그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놈의 몸 전체, 연구실, 건물 외관, 돔, 그 주변을 둘러싼 모든 숲, 그 아래 지저 속 원시 대지가 부르는 노래였다.
그 순간, 내가 놈에게 귀를 깨물리던 순간 강은 놈에게 먹히고 있었고 온 세상이 플랜의 노랫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어떤 소리도 그걸 꿰뚫고 들어올 순 없었다. 다른 어떤 소리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세상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화면은 꺼졌다. 미완이 말한 3분간의 공백 부분이었다. 화면은 없지만 나는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었다. 이제 강은 어디에도 없다. 마취에서 덜 깬 심장에 뻐근한 상실감이 전해져 왔다.
“그게… 흠… 우리가 너무 방심했던 거예요. 우린 우습게도 저 놈이 강을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어요. 강도 그랬죠. 그녀는 플랜과 소통한다는 착란에 빠져 있었어요.”
어느새 미완이 곁에 서 있었다. 나는 콧물을 훔쳤다. 미완은 굳이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우리가 발견했을 때, 저 플랜은 말라죽어 있었어요. 미라처럼 바싹. 내부엔 식물과 똑같은 물관만 즐비하더군요. 그건 약간 예상외였지만요. 창이 궁금하시다면 나중에 연구실에서 보실 수 있도록 조처해 둘게요. 대신 한 가지 굉장한 걸 발견했죠.”
나는 그가 내미는 사진을 보았다.
“소름 끼치게도 놈들은 땅 밑에 거미줄처럼 얽힌 균사로 그들만의 통화 수단을 갖고 있었어요.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유선 전화망처럼요. 아니 유기적인 형태와 정교함에선 놈들이 앞서요. 놈들은 균사를 통해 서로 양분을 교환한 흔적도 있었어요.”
나는 미완의 말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
“우리는 당신이 재생하는 동안 균사의 행방을 쫓았어요. 연구실 벽에는 거대한 유기체 지도가 펼쳐졌죠. 그게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아세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숲입니까?”
“바로 맞아요. 연희 씨 댁이었죠.”
미완과 연희는 서로 마주 보았다.
“우리는 놈들이 미리 눈치채고 숨지 못하게 신중하게 헌터를 배치하고 균사 마디에 동시 다발적으로 산성액을 부었어요. 그야말로 전면전이었죠. 창이 그 광경을 보지 못해 무척 아쉬워요. 땅을 온통 파헤친 덕분에 송전관까지 건드려서 반나절 간 <돔>의 기능이 정지했지만, 완벽한 안전에 비한다면 작은 대가죠.”
“과연, 완벽할까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맞지 않기를 빌었지만 뇌가 지끈지끈한 이런 종류의 예감은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놈들은, 양분 말고 다른 것도 이동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놈들은 영양분뿐 아니라 몸 전체를 이동했어요. 식물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신출귀몰할 수 있었는지 이제 알았습니다. 연구실의 플랜은 말라죽은 게 아니라 여길 떠난 겁니다. 놈들은 분명히 사람을 씹어서 양분화하죠. 그건 기타 소화 기관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냥 물관뿐이란 건 말이 안 되죠.”
“믿을 수 없어요! 그런 건 말도 안 돼요! 그럼 놈은 왜 일부러 여기에 잡혀 있었던 거지요? 언제든 나갈 수 있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완은 플랜에게 농락당한 분통을 나에게 터트렸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강에게 상상병이라도 옮은 건가요?”
“강이 옳았습니다. 놈에겐 상식보다는 상상력을 적용시키는 편이 낫습니다. 낡은 껍질은 버려두고 중요한 알맹이만 분해시켜서 균사를 통해 이동 후 재조합한다면 발이 없어도 무척 안전하고 효율적인 이동이 됐겠죠. 게다가 제가 최근에 만난 놈은 본체와의 분리도 가능했습니다. 물론 장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애가 나무 사이를 건너뛸 때 분명히 식물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놈이 나를 먹을 땐 분명히 플랜이었다.
“저를 쏜 전자총 지금 갖고 있나요?”
미완은 주저하며 총을 내주었다. 나는 총신에 저장된 최근 사용 기록을 불러내고 녹음 칩의 나머지 부분을 재생했다. 강을 잡아먹고 무거운 연기처럼 바닥으로 살포시 내려앉은 플랜은 천천히, 천천히 말라 가고 있었다. 나는 화면 아래의 시간을 확인하고 총신의 사용기록과 대조했다. 역시 녀석이 나를 잡아먹던 시간과 겹쳐졌다.
“후….”
절로 한숨이 났다. 나는 강으로 변하는 녀석의 얼굴과 난반사되는 눈동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저를 잡아먹는 순간 놈의 모습이 변했습니다. 천천히 여기 연구실에 있던 플랜의 모습으로.”
나는 놈의 외관이 강을 빼다 박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도 미친 소리를 더 신빙성 없게 만들 수 있는 어떤 말도 보태선 안 됐다.
미완은 여우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직접 거기 가보면 알게 될 겁니다.”
나는 ‘끙’하고 몸을 일으켰다. 미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안됩니다. 창은 아직 몸이….”
“지금 몸 운운할 때가 아닙니다. 이건 인류 전체의 존망이 걸린 문젭니다.”
“이번엔 당신이 너무 확대 해석 하는 거 아녜요?”
내내 잠자코 있던 연희가 항의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환자복을 갈아입었다. 새 육체는 새 옷처럼 뻣뻣했지만 활력이 넘쳤다.
숲은 거의 초토화 상태였다. 곳곳에 플랜을 사냥하느라 태운 자국이 역력했지만 주변에 흩어진 흙더미로 보아 진짜 플랜을 잡은 게 아니라 균사를 처리하고 남은 흔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그 애-혹은 그것-를 만난 자리를 찾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주변에 격자무늬로 난사된 광선총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뒤처리는 제가 했어요. 방법은 대강 알고 있으니까요.”
뒤쫓아온 미완이 말했다. 그는 나름 해냈다는 것에 뿌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흙을 움켜쥐었다. 버석하고 달큰한 냄새가 났다. 플랜이 사는 냄새였다.
“놈을 잡은 즉시 불태웠습니까?”
“예? 물론이죠. 아, 잠깐… 태우기 전에 당신 뇌부터 척출했어요.”
어째 재생 시간이 지나치게 짧더라니.
미완은 내게 감사의 인사를 원하는 듯했지만 난 전혀 고맙지 않았다.
“미숙한 플랜 헌터가 어떻게 당하는지 압니까?”
“네?”
“사냥에 만족하고 잠깐 방심한 틈에 남은 찌꺼기에서 재생한 놈에게 당하는 사례가 가장 많죠. 놈들의 생명력은 그만큼 강력합니다.”
나는 신발 끝으로 주변의 흙을 헤쳤다. 놈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헌터도 아닌 비전문가가 놈들을 뿌리 끝까지 제대로 처리했을 리 만무하다. 그럼 놈은 미완이 내 뇌를 꺼내는 틈에 재생해 우리를 공격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럼 분명히 뭔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거다. 모든 생물에게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최우선시 하는 일. 아마도 번식이겠지. 젠장. 범죄 현장으로 돌아온 범죄자가 이런 기분일까?
“역시.”
내 발 앞에는 설치류가 저장해 둔 도토리 같은 것들이 잔뜩 드러나 있었다. 완벽한 원은 아니지만 거의 원에 가깝고 뾰족한 돌기 때문에 씨앗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은색으로 보얗게 반짝였다. 그 애의 머리색과 겹쳐 보이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
미완이 허리를 굽혔다.
“이게 뭐죠? 알? 씨앗?”
“뭐든 간에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어떤 종류의 것도 아닐 겁니다. 놈들은 지금 이 순간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처음 갓난애 모습에서 성체로 진화했듯이.”
나는 견본으로 하나를 굴려내 파삭 밟았다. 끽소리와 함께 끈적한 진액과 엷은 초록빛의 물풀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뭐든 간에, 냄새 한번 지독하네요.”
따라온 연희는 코를 싸쥐고 물러났다. 미완과 내 눈이 마주쳤다. 미완이 먼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건 정액 냄새였다.
“그럼 이게 플랜의 종자란 말입니까?”
뒤늦게 도착한 연구진은 씨앗을 보자 뛰지도 않고 숨을 헐떡였다. 나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땅을 해쳐 플랜의 씨앗을 모두 파냈다. 그리고 출력을 높인 광선총을 그 위에 난사했다. 하얀 연기와 붉은 섬광이 지면에 넘실댔다.
“지금까지 놈들의 번식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건 우리가 멍청했던 게 아니라 놈들에게 ‘번식법’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존재하죠.”
“어떻게 이런….”
미완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고개 저었다. 밤잠을 설쳐 가며 강 옆에서 함께 플랜의 생식을 관찰하던 게 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잠깐, 견본을 좀 놔두지 그랬소. 연구소에 가져가면….”
연구진의 멍청한 소리에 나는 턱을 꽉 물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두 번 다시 위험한 장난질은 안 됩니다. 이미 그쪽도 피를 볼만큼 봤잖습니까?”
“당신은 일개 헌터요. 우리가 당신 말에 따라야 할 필요는 없소.”
“저도 그쪽 말에 따라야 할 필요 없습니다. 제 임무는 플랜 말살이니까요.”
하얗게 타버린 씨앗 더미 앞에서 망연자실한 미완과 연구진을 두고 난 헌터 회선 전체를 열어서 동료 플랜 헌터들에게 씨앗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전했다. 연구진의 플랜말살이라는 위대한 성과에 실직을 우려하고 있던 모두는 예상한 만큼의 경악과 환호-무엇에 관한?-로 나에게 답신했다.
“이 숲은 우리가 처리하도록 하죠. 아직 수백 개는 더 있을 겁니다.”
정액에 들어 있는 정충의 수가 정확히 얼만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몇 만 마리다. 분명 씨앗은 그만큼 존재할 테고, 지금 태운 씨앗은 고작 100여 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씨앗은 균사망(菌絲網)의 유기통로가 태워지기 전에 이미 사방으로 퍼져 나갔으리라.
“창, 어째서…?”
미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는 불안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나로선 대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시 사항을 나눈 30분 뒤, 그냥도 무너진 철골 구조물처럼 흉측하던 숲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참혹하게 유린되었다. 숲이 없으면 <돔>이 죽고 숲이 있으면 플랜이 산다. 나는 헌터들 사이의 농담을 떠올리고 착잡해졌다. 왠지 스스로의 숨통을 조이는 어리석은 싸움을 시작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결코 기권할 수는 없었다.
새벽녘에 지친 몸으로 다시 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병상으로 가야 한다는 미완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상실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전날에 보았던 녹음 칩을 재생했다. 낮은 노랫소리, 노이즈, 찌걱찌걱 씹는 소리와 피가 사방에 흥건하고…
“어?”
나는 잠깐 재생을 멈추고 2, 3초간을 되돌렸다.
<그래. 좋아. 나쁘지 않네.>
강은 팔을 펼쳤고, 플랜은 그녀를 허공으로 안아 올렸다. 강이 플랜에게 안기기 직전 카메라 쪽을 보았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읽었다.
<창, 또 만나.>
갑자기 우주 밖으로 튕겨진 듯한 무시무시한 막막함이 온몸을 휩쓸었다. 노이즈처럼 미세하게 시작된 플랜의 노래가 어느새 거대한 합창이 되어 사방에 울리고 있었다. 나는 지구 한 구석에서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잎을 살랑이며 사람처럼 춤추는 것을 보았다. 놈들의 출현으로 인류가 공들인 지표 포장은 속절없이 뒤집히고, 타르 찌꺼기 밑에서 창백하게 썩어 가던 대지는 발가벗고 햇살과 입을 맞추었다. 댐에 가로막혀 있던 강은 유쾌하게 바다를 향해 내달리고 멸종했던 열대 나비가 날아올랐다. 창 너머 세상은 플랜의 눈처럼 아프도록 오색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다.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나는 그게 다음에 올 새로운 지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 핀, 지상 전체를 뒤덮은 새로운 지배 종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상체와 식물의 하체를 가진 꽃들이었다.
뚜-
재생이 끝나고 태고의 밤처럼 새카만 어둠이 화면을 물들였다. 나는 어느새 연구실 구석에서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웅크린 채 귀를 막고 있었다. 강이 필요했다. 이런 이야기쯤은 ‘상상력이 조야하다’며 가볍게 비웃어 넘겨줄 그녀의 유쾌한 목소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강은 어디에도 없다.
<창. 또 만나.>
강, 그건 대체 무슨 뜻이지?
뭔가 절대로 알고 싶지 않은 두려운 현실이 살금살금 내 등을 덮쳐 오는 것만 같다. 그때 불쑥 생체컴퓨터의 저장 메시지 신호가 새빨갛게 번뜩였다. 나를 흠칫 놀랐다. 동료 헌터였다.
<창, 내일부터 현장 복귀지? 잘해 보자구.>
나는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꼈다. 과연 내일의 나는 무엇과 싸우게 되는 걸까.
<끝>
※¹환상진화가'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유전적 구조가 다르다는 학설을 배경 하에 쓰였습니다. 현대인류는 과거의 인류와 다르며, 어쩌면 미래 인류는 벌써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2007> 이 글을 쓸 때는 아직 AI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레이 커즈와일이 예견한 인류와 AI의 결합으로 이미 ‘특이점’을 넘어선 신인류가 우리 곁에 있으며,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미래에서 지금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현재의 인간과 미래 인간이 섞여 사는-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가 잠시 공존하던- 그런 시기에 살고 있을 거 같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건, 일부에는 최신 과학의 미래와, 일부에는 화산 밑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삶이 그대로 펼쳐질 거 같습니다. 둘은 이미 다른 인류 종일 지도 모릅니다.
인간과 인공지능/로봇/신인간+a존재의 구분점, 인간이란 무엇이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