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솔솔 불어 아침부터 출근길이 설렜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구나. 이런 날은 야외수업하기 딱 좋은데..
예전에는 (라떼는...)날씨가 좋은 날(수업하기 싫은 날) 아이들이 야외수업을 하자며 졸라대곤 했다. 곤란한 듯 고민하는 척하다가 인심 쓰듯 허락해 주면 아이들 입에선 '선생님 사랑해요' 소리가 절로 나오곤 했다. (사랑이 그리 쉽더냐?)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면 속담 맞추기, 고사성어 맞추기 게임도 하고, 시 낭독하기, 시 필사하기 등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그런 수업을 하고 오면 다른 교과(특히 수학교과) 선생님께서는
"국어시간엔 참 낭만이 있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다.
3년간 코로나로 인해 학교를 드문드문 나온 아이들은 온라인 수업은 알아도, 야외수업은 생소해한다. 나 역시 이것저것 신경 쓰고 준비하는 것이 귀찮아졌다. 나이를 탓하며 세월을 야속해하며 그렇게 낭만을 잊어가고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 회원께서 '낭만에 대하여'라는 글을 쓰셨다.
학창 시절 안소니를 닮으신 선생님을 떠올리며 음악시간에 야외수업을 하며 봄노래를 부르던 그 시절 낭만을 이야기하셨다. 글 마지막에 피천득 시인의 <오월>을 읽다가 마음이 동하여, 오늘 5교시는 야외수업을 하겠다고 아이들 편에 전달하였다.
몇 주 뒤에 있을 작가와의 만남을 준비하면서 이번주부터 이금이 작가의 소설 읽기를 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책을 가지고 미리 봐둔 등나무 벤치에 앉아 한 시간 동안 책을 읽겠다고 했더니 아이들은 환호를 했다.
그러나..
막상 나갔는데 개미가 몸을 타고 올라온다며 질색하는 아이, 나뭇가지가 머리 위로 떨어지자 놀라 소리 지르는 아이, 햇볕이 따가워 눈이 부시다는 아이까지.. 이대로 접어야 할까 싶었지만, 적당한 장소를 다시 물색하여 책을 읽도록 했고 초반에 어수선한 분위기는 시간이 지나자 가라앉았다. 아이들은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옆에 앉아 책을 읽어야지 했는데, 책은 눈에 안 들어오고 책 읽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게 재미있다.
처음엔 꼿꼿하게 앉아 책을 읽더니 하나둘 쓰러진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흠칫하길래 '괜찮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맘 편히 누워 책을 읽는다.
"오늘 바깥에서 책 읽으니 어땠어?" 하고 물었다.
"허리가 아팠어요. "
"책상이 없으니 불편해요."
"너무 따뜻해서 졸렸어요."
헉.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라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낭만은 무슨.. 그냥 하던 대로 교실에서 책을 읽어야겠구나.. 생각할 즈음에 아이들이 말한다.
"근데 좋았어요."
"뭐가?"
"그냥 기분이 좋았어요"
"맞아요. 따뜻하고 편안했어요"
<사랑의 꿈>을 쓴 손보미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럴 때가 있잖아요. 소설의 내용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걸 읽었던 순간은 이상하게 잊히지 않을 때가. 중요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데 문득 어느 날 기억해 내고 마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손보미 작가는 그런 순간들이 모여 소설을 쓸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오늘 읽은 책의 내용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오늘의 순간들은 잊지 않기를 바랐다. 오월 어느 따스한 봄날 개미를 쫒으며 책을 읽은 기억, 그날 참 따뜻하고 평화로웠던 기억, 기분이 좋아 마음이 편했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