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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의 힘

by 슈퍼엄마

졸리고 따분한 오후.

밥도 먹었겠다 선생님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기 딱 좋은 시간이다.

아이들을 깨우는 나도 살짝 졸음이 온다.

이때 한 학생이 기회라는 듯이 큰 소리로 외친다.

"선생님 너무 졸려요!!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주세요!!"

"재밌는 이야기? 음.. 뭐 해줄까?"

"첫사랑이야기요.ㅎㅎ"

"내가 첫사랑이야기보다 더 재밌는 이야기 해줄게"

"우와~"

아이들은 작전이 성공했다는 듯 일제히 환호한다. 사실 어떤 이야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수업'을 안 하는 것이니까.


이야기를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들 눈이 또렷해졌다.

수업시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눈인데... 조금은 서운하지만 그것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이야기들은 주로 책의 줄거리이다.

물론 '책'이라는 말은 쏙 뺀다.

나의 이야기, 내가 아는 누군가의 일처럼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이들이 이야기에 한창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 말을 끊는 게 포인트이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아우성을 칠 때 칠판에 책 제목과 작가 이름을 적는다.

아이들은 처음에 어리둥절해한다.

"그게 뭐예요?"

"내가 방금 들려준 이야기. 그 책 제목이야"

"헐~ 뭐야? 책에 나온 이야기였어요? 아. 선생님 이야기 아니었어요?"

"뭐,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다 그런 거지 뭐. ㅎㅎ"

아이들은 속았다는 탄식과 함께 책에 저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냐고 놀라기도 한다.

"선생님, 그 책 학교 도서관에도 있어요?"

그 와중에 책을 좋아하는 몇몇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뒷 이야기가 궁금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온다. 책을 빌려온 아이에게 읽고 결말을 말해달라고 하는 아이도 있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직접 책을 읽을 엄두는 안 나는가 보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책 읽는 것을 싫어해도, 이야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학창 시절에도 친구들에게 책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했다.

내 이야기의 단골손님들은

"요즘 뭐 읽어?" "재미있는 이야기 없어?"라고 묻곤 했다.

그럼 나는 언제든지 이야기를 풀어댔고 몇몇 친구들은 나를 '이야기보따리 장수' 라고 불러줬는데 이 별명에 은근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대학시절 전공 시간에 조선시대에는 실제로 비슷한 일을 하는 직업인 '전기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기수는 소설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던 낭독가인데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낭독을 하다가 흥미로운 대목에 이르면 이야기를 멈추고 돈을 던져주길 기다렸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직업이 인기가 있자 책을 읽지 못하는 까막눈들 중에 책의 내용을 외우거나 지어서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아주 오래전에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참 좋아했던 것 같다.


'호모나랜스'는 이야기하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 본능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확실히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정직하게 살아라'라는 듣기 싫은 뻔한 소리도 '옛날 옛날에 나무꾼이 살았대. 하루는 나무를 하다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는데...'라고 시작하는 순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요즘은 강의를 하더라도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기보다 이야기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스토리텔링이 인기가 좋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는 상상하게 된다. 인물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기도 하고 그 심정을 떠올려보고 공감하고 이해하기도 한다. 나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힘을 통해 결국 타인을 이해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소설을 읽을 때 사용하는 뇌 부위와 인간관계를 다룰 때 사용하는 뇌 부위가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내가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책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아이들이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고 스스로 이야기를 찾아 읽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재미를 느껴서 독서를 시작할 때 성인이 되어서도 책을 즐기는 평생 독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적 책을 읽으며 이야기의 재미를 알았다. 그 덕분에 어떠한 목적이 없어도 심심하면 책을 꺼내 드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읽은 책들이 나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데 큰 힘이 되어주었다.


수업시간에 짧은 단편 소설을 함께 읽고 난 뒤 한 학생이 말했다.

"책이 원래 이렇게 재미있는 거예요? "

그 말에 한편으론 놀랐고, 한편으론 기뻤다.

'책을 원래 싫어하는 아이는 없구나. 아직 재미있는 책을 못 만났을 뿐이구나. '

그리고 거기서 내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도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기수가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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