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를 키우면서 왜 이렇게 우울하고 힘들었는지 돌이켜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내 안에 나는 없고 엄마만 있었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을 그렇게 좋아하던 내가 읽는 책이라고는 아이 그림책과 육아서가 전부였다. 글을 써본 게 언제인지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둘째를 키우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를 위한 책이 아닌, 나를 위한 책.
둘째를 낳고 아이가 잠들면 그 옆에서 틈틈이 읽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라는 제목의 책을 만났다. 제목부터가 내 이야기 같아서 곧바로 손이 갔다.
이 책의 저자는 아이를 낳고 힘든 상황 속에서 책을 읽고 그 속에서 위로와 조언을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독서모임을 시작하면서 그녀의 삶이 확 바뀌었다고 했다. 독서모임을 통해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면서 지금의 작가가 된 것이다.
그 당시 읽고 싶던 책을 읽으며 충분히 즐거웠지만 가끔씩 예전에 동료교사들과 함께 하던 독서모임이 그립기도 하던 차였다. 그러나 100일도 안된 아이를 키우면서 독서모임에 참석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코로나 이전이라 지금처럼 온라인 독서모임이 활성화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맘때 자주 드나들던 교사맘 카페가 있었는데,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공감대 형성이 잘 되고, 좋은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전까지 카페에 가입하면 등업신청을 위한 글 외에는 전혀 활동하지 않는 눈팅족으로 살아왔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글을 올렸다.
"독서모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글을 올려놓고 시간이 지날수록 소심해지고 초조해졌다.
'한 명도 지원 안 하면 어쩌지? 괜한 짓을 했나? 글을 내릴까?'
그리고 다시 들어가 본 글 아래에는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려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줄 몰랐다. 그렇게 20여 명이 함께 모임을 하게 되었다.
온라인으로 카페를 만들고 가입한 사람들끼리 자기소개글을 올리도록 했다.
그중엔 나처럼 휴직 중인 엄마들이 많았다. 다들 비슷한 갈증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모임명을 만들고 회칙까지 만들고 나니 제법 그럴듯했다.
모임에서는 두 달에 한 권의 공통 도서와 한 달에 한 권의 개인 도서를 읽었다. 그러니까 한 달에 1.5권의 책을 읽는 셈이었다. 공통도서 추천은 돌아가면서 했는데 추천한 사람이 대표로 서평을 쓰면 댓글로 감상을 나누며 소통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개인책은 한 달에 한 권이상 자유롭게 읽었고, 서평을 쓰도록 했다.
그전까지는 책을 읽고 간단히 감상을 끄적이는 정도였지 제대로 서평을 써본 적은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쓴 서평은 <라틴어 수업>(한동일)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도 내가 좋아하는 책으로 손꼽힌다. 이 책은 주로 잠든 아이 옆에서 새벽에 유축하면서 읽었다. 그래서인지 서평도 지나치게 감상적이어서 마치 일기를 쓴 것 같았다. 올릴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글을 올렸다. 서평을 쓴 것도 오랜만이지만 그걸 남들에게 공개한 것은 처음이었다.
서평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네요! 장바구니에 담아야겠어요!!'
'저도 이 책을 읽었는데 같은 책을 읽은 게 맞나 싶어요. 제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라 너무 신선해요. 책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선생님 서평 덕분에 전에 이 책을 읽고 적어두었던 문장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어요. 잊고 있던 좋은 내용을 다시 생각나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서평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심장이 마구 뛰었다. 지금 생각하면 '도파민'이 과도하게 분출된 것도 같다. 그들의 긍정적인 피드백은 온종일 집에서 살림과 육아에 쪼그라들었던 내 영혼에 주입되는 공기 같은 것이었다. 그 공기가 나를 숨 쉬게 했다.
서평 쓰는 일도 생각보다 재미있었다.책을 읽고 서평을 통해 내 생각을 한 번 더 정리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의 서평을 읽으며 내가 생각지 못한 새로운 감상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다른 책을 찾아 읽고 싶어 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은 깊고 넓어졌다. 그건 책이 주는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아이가 잠들면 카페에 가서 서평 올리고 다른 분들이 쓴 서평 읽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한창 잠이 부족한 시기였는데도 피곤하지 않았다. 서평 이외에도 책 추천글, 책 쇼핑글 등을 읽다가 한밤중에 지름신이 찾아오기도 했다.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고 다른 사람들과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 동안 나는 엄마가 아닌 온전히 '나'의 모습을 되찾았다.
느슨한 모임인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결속력이 약해지긴 했지만 한결같이 함께 해주며 힘을 주는 몇몇 좋은 인연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덕분에 모임은 2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나도 복직을 하고 바빠지면서 더 이상 카페 운영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간 쌓인 글들이 아까워서 카페는 폐쇄하지 않고 있다.
이 모임은 아이를 낳고 힘든 시기를 잘 버티게 해 준 것 뿐 아니라 내게 여러모로 큰 의미가 있다.
내가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어주었고, 늘 남들이 만들어 놓은 자리에 조용히 들어가 있는 듯 없는 듯 적당히 활동하던 나를 모임을 계획하고 주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덕분에 현재는 동네 엄마들과 하는 독서모임, 온라인 독서모임 그리고 글쓰기 모임까지 운영하고 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찾아보는 사람, 없으면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동안 내 삶은 조금 더 재미있고 설레는 것이 많아졌다. 그 시작을 열어 준 독서모임은 지금까지 내게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