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자아가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호불호가 확실한 편이었다. 그리고 뭐 하나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다. 특히 좋아하는 캐릭터에 집착하는 편이었는데 예를 들어 타요에 빠지게 되면 하루종일 타요장난감을 손에 놓는 일이 없고 종일 타요 노래만 부르는 식이었다.
정확히 5살이던 해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아이는 슈퍼맨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를 반만이라도 닮고 싶었던 아이는 상징적으로 수건을 망토처럼 두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하루종일. 목욕을 할 때만 잠깐 풀었다가 마치 옷을 입듯이 자연스레 망토를 둘렀다. 심지어는 잘 때도 하고 잤는데 목이 감겨 위험할까 봐 잠들면 내가 풀러 놓곤 했다. 그러나 아이는 일어나면 제일먼저 망토부터 확인했다.
슈트를 벗으면 힘이 약해지는 슈퍼맨처럼, 수건 두르지 않는 아이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망토 대신 수건
그렇게 2개월간을 꼬박 수건을 두르고 다니던 아이는 처음 수건을 둘렀던 날처럼 별다른 이유 없이 수건을 두르지 않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엄마, 수건 한 게 더 멋있어? 안 한 게 더 멋있어?"라고 묻길래 안 해도멋있다고 말했더니 결심을 한 듯 그날 이후로 딱 끊은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이가 찍은 모든 사진의 포즈가 하나로 통일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역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그다음은 스파이더맨이었다.
종일 수건을 두를 때처럼 아이는 종일 스파이더맨에 빙의한 듯한 포즈를 취하고 다녔다.
마침 그해 핼러윈 데이에 어린이집에서는 코스프레 복장을 하고 오라고 했고, 이참에 스파이더맨 옷을 사주었다.
문제는.. 아이가 그 옷을 집에서고 밖에서고 시도 때도 없이 입고 다닌다는 것이다.
스파이더맨 옷을 풀착장한 그 순간 아이는 진심으로 스파이더맨이 되어 지구를 구할 것만 같았다.
이건 2개월 정도가 아닌 그보다 훨씬 더오래갔다. 하도 입어 지퍼가 고장 나면 지퍼를 수선해 오기도 하고 손가락 부분이 찢어지면 꿰매주기도 했다. 그렇게 아들의 기쁨을 적극적으로 응원했다.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인 우리 아이는슈퍼마리오에 빠져있다.
그 시작은 2년 전인 7살 때였다. 처음에는 스키복을 보더 슈퍼마리오 옷과 비슷하다고 찾아 입고 모자를 쓰고 종이로 콧수염을 만들어 붙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땐 그림도 만들기도 뭐든 슈퍼마리오였다. 난 앞으로 닥쳐올 일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는 슈퍼마리오가 되었다.
이 의상 역시 2년간 몇 번을 꿰매고 수선을 해가며 마르고 닳도록 입었다. 2년이 지나고 아이의 키가 자라남에 따라 옷은 입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아졌지만 아이는 쉽게 옷을 놓아주지 못했다.
이제 그만 보내주자..ㅠ
옷을 다시 사야 하나... 고민했는데 아이는 마리오 옷을 학교에도 입고 가고 싶다 했다. 그건 안된다고 아이를 설득하다가 학교에도 입고 갈 수 있는 마리오 옷을 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인터넷으로 멜빵바지를 주문했다.
아이는 엄지를 있는 힘컷 치켜세우고 역시 엄마밖에 없다고 했다. 좋은 브랜드에 멋진 옷을 입고 등교하는 아이의 친구들은 우리 아이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아이는 빨간색 티를 입고 마리오가 되기도 하고, 초록색 티를 입고 루이지가 되기도 한다. 이 옷을 입고 슈퍼마리오 레고를 조립하고 슈퍼마리오 게임을 하고 슈퍼마리오 영화를 본다.
가끔 남편이나 시어머니는 창피하게 왜 그렇게 입게 하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아이가 멋지다고 생각한다.
성향상 무엇이든 깊게 푹 빠지는 일이 잘 없고 적당히 즐기는 편인 나는 아이의 이런 면이 부럽기도 하다.보수적이고 엄격했던 부모님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탓에 내 마음대로 좋고 싫음을 표현을 하기 어려웠던 나는 내 아이만큼은 자유롭게 키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아이의 이런 행동을 말리기보다는 지지하는 편이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위험하지 않을 것, 둘째는 남에게 해가 되지 않을 것.
살아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시기도 흔치 않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걸 제대로 아는 일도 쉽지 않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고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아이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즐기고 몰두하게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