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독서의 꽃, 독서토론

by 슈퍼엄마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 3년 동안의 동아리 활동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는 '책사랑'이라는 독서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이름이 너무 정직(?) 하고 촌스러워서인지 그다지 인기 있는 동아리는 아니었다. 그 당시 수시 지원이 확대되고 논술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책사랑'동아리는 대학교 스펙 마련을 위해 전교 최상위권 학생들이 주로 가입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직 책이 좋아서 동아리에 가입 지원서를 덜컥 제출했다.


'책사랑'은 한 달에 한 번, 선후배들이 책을 읽고 만나 독서토론을 하고 일 년에 한 번 독서 신문을 발행하는 활동을 한다. 그리고 각종 독후감, 글짓기 대회에 출전하는 자격도 주어진다. 바로 그 대회를 노리고 들어온 친구들이 많았다. 막상 동아리에 가입하고 보니 그냥 책이 좋아서 들어왔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 학생은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함께 읽은 책은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작품이었다.

<난. 쏘. 공>은 1970년대 산업화, 도시화의 이면에 소외된 계층과 노동자의 삶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내용도 무거운 데다 상징과 같은 고도의 문학적 장치가 사용되어 의미를 파악하기 쉬운 책은 아니다.


당시 그 책을 읽으면서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지만 선배들과 독서토론을 앞두고 긴장되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독서토론을 하는 날, 선배들의 모습은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책을 읽고 인상 깊은 구절을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경험, 요즘 우리 사회의 문제를 책의 내용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날 선배들이 얼마나 크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그때는 고작 한두 살밖에 차이 나지 않았지만 선배들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모습은 나를 압도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뿌듯했고 스스로가 대견하고 멋져 보였다.


그 후로도 난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다. 혼자 읽을 때 잘 이해가 안 되던 부분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해되는 경험도 신기했고, 같은 구절을 읽고도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최인훈의 <광장>과 같은 국내 작품뿐 아니라 <이방인>, <동물농장>과 같은 외국 고전을 함께 읽고 독서토론을 했다.

내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고 싶다는 욕심에 생각을 정리하며 꼼꼼히 읽기도 했다. 마음과는 달리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한 날도 많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되었고, 그런 경험들이 나의 진로와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고등학교 신입생 시절, 책을 읽고 나눈 나의 이야기, 삶의 이야기를 통해 친구들은 물론 선배들과도 더욱 가까워졌다. 우리는 힘들 때 조언과 위로를 주고받으며 더욱 돈독해졌고 덕분에 학교생활에 즐거운 추억도 많이 생겼다.

그 좋았던 기억들 때문인지 교사가 된 지금, 학교에서 아이들이 함께 책을 읽고 독서토론을 할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마련하고 있다. 토론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논제를 가지고 찬성과 반대로 나눠서 하는 찬반토론을 떠올린다. 하지만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토론은 '이야기식 비경쟁 토론'으로 토론보다는 토의나 대화에 가깝다.


'이야기식 비경쟁 토론'은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과 감상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으며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함께 의견을 나누는 토론이다. 남을 공격하지도, 승자가 패자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이러한 독서토론을 생소해하고 어려워하던 학생들이 하나 둘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참 재미있고 흐뭇하기까지 하다.


요즘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그냥'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냥요"

"왜 그런 행동을 했니?" "그냥요.."

(그냥요, 또는 몰라요)

정말 이유가 없어서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유야 다 있겠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거나 정리가 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정보를 수용하고 받아들일 줄만 알지 선별하거나 자기 생각을 보태는 일을 어려워한다.

오랜 시간 동안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진 탓도 있고 어릴 적부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버릇없다고 여기는 어른들에 의해 말 잘 듣는 학생이 돼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학생은 아니었다. 납득이 가지 않으면 "왜요?"라고 덧붙여서 어른들의 지청구를 듣는 일도 많았다.

대학 다닐 때도 선배들의 지시가 부당한 것 같으면 꼭 짚고 넘어가서 눈엣가시 역할도 많이 했다.

(요즘 우리 첫째가 그런다. ^^;;)

간혹 자기표현을 하는 것을 자기주장이 세거나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토론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토론은 경청을 전제로 한다. 남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자신의 이야기만 하면 토론이 될 수가 없다.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말하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토론은 일종의 대화이기에 토론 교육을 통해 인성교육과 인간관계의 교육도 이루어진다. 요즘과 같이 소통과 경험이 중요한 시대에 꼭 필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토론은 독서를 하고 난 후에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 책에서 다루고 있는 쟁점들에 대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기도 하고 내 생각을 정리해 보기도 하면서 책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책을 그냥 읽는 사람과 책을 읽으며 자신과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고 질문하며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읽는 사람은 같은 책을 읽었어도 얻어가는 것이 다르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독서토론을 하고 소감을 물어보면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은 뜻밖에도 '재미있다'이다. 사실 독서토론의 필요성은 이거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고 대화하는 게 재미있다는데.. 이것보다 더한 교육적 의미가 필요할까?

나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넘은 지금도 독서동아리에 대한 기억이 '즐거웠다'로 남아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책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는 당연히 독서 토론도 많이 열려야 한다. (중략)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을 다룬 책을 매개로 참가자들이 자신의 내면을 여는 자리여야 한다. '

-<책, 이게 뭐라고>, 장강명-


장강명의 <책, 이게 뭐라고>에서는 독서 토론이 책을 매개로 참가자들의 내면을 여는 자리라고 표현했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을 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인지 짧은 시간에 서로에 대해 부쩍 가까워지는 느낌이 든다. 우리 학교에 이런 자리가 자연스러워지고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고 즐거운 경험을 좀 더 많이 하길, 그리고 어른이 돼서도 그 즐거웠던 경험으로 다시 책을 찾는 선순환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런 경험을 돕는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자리를 만들어본다.

독서토론 이후 아이들의 소감
독서 토론 후 아이들의 소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