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아이들이 쓴 고민을 받아 섞은 후 무작위로 나눠줬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친구의 고민글에 대한 처방글과 처방시를 적도록 했다.
친구의 고민을 받아 든 아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이거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라며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 아이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진지하고 무거운 고민을 받아 들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고민을 공유하지 마세요. 그리고 누구 일 것 같다고 추측하지도 말고. 고민에만 집중해서 처방전을 내려주세요!"
흐트러진 분위기를 다시 한번 잡았다. 자칫 장난스러운 태도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까.
지난 시간에 엄마가 큰 수술을 받고 경과가 좋지 못해 무섭고 걱정된다는 글을 쓴 아이의 고민을 누가 받게 될지 지켜봤다. 역시나 그 고민을 받은 아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글을 읽었고, 뭐라고 해줘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옆으로 슬쩍 다가가서 뭐라고 쓰는지 읽어봤다.
아이는 누군지 모를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3년 전 아빠가 암 수술을 받은 자신의 경험을 꺼내 썼다. 지금은 완치한 아빠에게 아플 때 뭐가 가장 힘들었냐고 물었더니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라고 했다며너의 어머니도 그러실 거라고, 그러니 오히려 더 힘내고 네가 해야 할 일도 씩씩하게 잘 해내라고, 그래야 엄마도 마음이 편하실 거라고. 그리고 꼭 나으실 거라고 썼다.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져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다른 쪽에 가서 아이들이 쓰는 모습을 지켜봤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뭐로 결정해야 할지 고민이라는 친구에게는 나처럼 하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너의 고민이 너무 부럽다고 썼다.
공부도 하기 싫고 만사 귀찮다는 친구에게 나도 그런 적이 있다고, 그럴 때 이 방법이 도움이 되었었다며 자신의 비법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응원의 말도 잊지 않았다.
부모님과의 갈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는 누군지 알면 꼭 안아주고 싶다고 적었다.
어떤 고민은 나와 너무 닮아있고, 어떤 고민은 나와 너무 멀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적절한 위로와 조언을 건넸다.
다음시간에 고민의 주인에게 처방전을 돌려주었다. 아이들은 성적표를 받는 것처럼 떨리고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다들 받은 종이를 펼쳐 조용히 읽었다.
엄마가 아프다고 쓴 그 아이 쪽으로 시선을 향했는데아니나 다를까 그 여학생이 자신에게 써준 처방글과 시를 읽고 울고 말았다. 그 친구 뒤에 앉은 남학생은 놀라며 "야 너 왜 울어?" 하고 묻는다.
"너무고맙고 감동받아서.." 차마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우는 친구를 바라보며
"야.. 대체 뭐라고 썼길래 울 정도냐?"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자기가 쓴 글을 읽고 친구가 감동받고 고마워 운다고 상상도 못 하는 듯하다.
한 여학생은 자신의 고민에 처방글을 내려준 아이와 사랑에 빠졌다.
"선생님 저 이거 써준애랑 사귈 거예요!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애가 우리 학교에 있다니! 누군지 궁금한데 알려주시면 안 돼요?!"
차마 '너랑 맨날 투닥거리는, 네 옆에 앉은 애'라고 말해줄 수가 없었다.ㅡㅡ;;;
나만 알고 지켜보는 이 상황이 너무 재밌다.
'다들 속엔 이렇게 다정한 말과 따뜻한 마음을 품고 살면서 그걸 감춘 채 겉으론 까칠한 척, 쎈 척하는 거였어? 훗. 귀여운 것들!'
어쩌면 이런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단단한 껍데기로 무장하고 있는 것 같아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아이들은 대부분 친구가 써준 처방글을 읽고 고마워했다. 자신에게 써 준 글을 몇 번이나 읽어보는가 하면 큰소리로 "내 고민 들어준 사람 고마워~~" 하고 외치는 아이도 있었다. 평소 내 이야기를 이렇게 열심히 들어준 사람도 진지하게 같이 고민해 준 사람도 없었던 것처럼 진심으로 감동받은 것 같았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일본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도 고민을 상담해 주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인생에서 이렇다 할 답도 없이 살아가던 세 명의 인물이 우연히 다른 사람의 고민을 상담해 주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고민을 상담해 주는 일은 남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남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한 생각이 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고, 우리 모두가 비슷한 고민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세상엔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 덜 외로워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고민을 써 내려가고 또 들어주면서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어줬다. 남을 위로하려는 선한 마음이 모여 교실 안은 좀 더 따뜻해졌고, 우리들은 좀 더 웃을 수 있었다.
아, 나도 고민을 적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 이것저것 욕심 내지만 뭐 하나 잘하는 게 없는 것 같다고, 너무 피곤하기만 하다는 만성피로님의 고민글은 우리 반에서 가장 말수가 적은 남자아이에게로 갔다. 잠시 쉬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아이의 처방글, 그리고 아이가 써준 처방시.
글을 읽고 어깨와 등을 쫙 펴본다. 힘내라는 그 아이의 응원의 말이 내 맘에 닿는다. 처방글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는 아이들의 마음을 나도 느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