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이야기가 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에는 너무 부끄럽고 내 약점을 들키는 것 같은 이야기.
그렇다고 혼자 삭이고 넘어가기엔 억울하고 답답해서 가슴에 천불이 날 것 같은 이야기.
더구나 그 이야기의 대상이 가족일 경우에는 내 얼굴에 침 뱉는 것 같아 더욱 털어놓기가 힘들다.
학창 시절에는 정말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때가 있었다.
“이건 진짜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로 시작하는 이야기.
감수성이 예민할 때라 그런지 그 시절 친구는 함께 울어주고 함께 화를 내주며 나를 위로해 주곤 했다. 그리고 우리 둘의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며 나를 안심시켜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원래 그맘때 우정은 멀어지고 가까워지고를 반복하며 변덕스럽기 그지없다.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나로 인해 기분이 상하거나 화가 나 보일 때는 우리의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닌 일이 되어버릴까 봐 어린 마음에 조바심이 났었다. 비밀이 새어나갈까 봐 친구의 비위를 맞추고 스스로 약자가 되는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서는 나의 아픈 부분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일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웬만한 일에는 무뎌지기도 하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나를 화나게 하는 그 일을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끔은 그게 잘 안 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속상한 마음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때 내가 찾은 방법은 인터넷 익명 게시판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는 마음으로 다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속이 좀 후련해져서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내 글에 달린 나를 동정하거나 위로하는 글을 읽다 보면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의 아픔을 비교 삼아 ‘저런 사람도 사는데..’라며 자신을 위안 삼는 댓글을 보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익명의 공간에 글을 쓰는 일을 관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몹시 마음이 답답한 날이었다. 일이 통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를 더욱 괴롭혔다.
그래서 생각을 잊고자 손에 잡히는 소설을 한 권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있잖아. 너만 알고 있어~’라며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었다.
읽으면서 ‘맞아 맞아. 나도 그런 그런 비슷한 적이 있어. 나도 그 마음 잘 알아’라며 격하게 끄덕이고 공감하기도 했다. 가끔은 정체를 알 수 없어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감정들을 대신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대목을 만나기도 했다. 그때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세상엔 참 별일도 다 있구나.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 그렇게 한바탕 울거나 웃으며 소설을 읽다 보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돌덩이가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후로 마음이 감당할 수없이 슬프거나 부당한 대우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 날엔 소설을 읽는다. 내 이야기를 자꾸 들여다보고 집중할수록 이야기는 심각해지고 무거워만 보인다. 그러다 끝내 감당할 수없이 커져버리기도 한다.
그럴 땐 소설 속 이야기를 읽어가고 다른 인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위로가 된다. 그 인물에게서 나와 닮은 점 또는 다른 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래서 결국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정답은 없지만 해답은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본질적인 문제는 변한 게 없지만 내 마음이, 시각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좀 나아질 때가 있다.
가끔 소설 읽는 행위를 시간 때우기나 시간 낭비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 물론 재미도 문학의 기능 중 하나이지만 나는 문학 특히 소설이야말로 인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이 사는 세상에 대해 그 어느 것보다 잘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그 거울에 나를 비춰보기도 하고 내 주변의 비춰보기도 한다. 그렇게 나를 이해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내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소설의 참된 기능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위로가 되어주기도 하고 희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이 내가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현실의 삶에서 필요하고 궁금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실용서 위주의 책을 읽느라 요즘 소설을 한동안 멀리했었는데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며 그 참맛을 다시 느끼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