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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스바닐라라떼 Jan 10. 2021

옷장에 숨겨뒀던 난방 텐트를 팔았습니다.


3년 전, 서울로 첫 발령을 받았다. 연고지도 없는 곳에 발령을 받다 보니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았다. 급하게 자취방을 알아보던 중 운 좋게 회사 관사에 당첨이 되었다. 본가의 주소지가 멀었던 덕을 봤다. 관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집이 어떤지는 상관없었다. 당장 지낼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기 바빴다. 운 좋게도 내 방은 10평이 조금 넘는 가장 큰 크기의 방이었다.


나의 첫 자취방이었던 관사의 모습

이 곳은 사무실로 쓰던 건물을 안에만 리모델링해서 관사로 만든 공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집 보단 사무실 같았다. 내 방은 가장 끝에 위치한 방이라 다른 방에 비해 크기는 컸지만 대신 엉뚱한 위치에 기둥이 있었다. 게다가 집은 유흥가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어 술 취한 사람들의 고성방가와 반짝이는 네온사인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했다.


사무실 같은 이 곳으로 매일 출근 같은 퇴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잠만 자는 임시거처가 아닌 나만의 취향이 담긴 공간으로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회초년생에게 인테리어 비용 같은 예산은 없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정말 필요한 것들만 사고, 그 위에 내 취향을 입혔다. 부모님 집에선 엄마의 취향으로 집이 꾸며졌다. 때가 잘 타는 흰색 침구는 절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집을 꾸며도 된다는 생각을 했을 때, 난 새하얀 호텔식 침구를 제일 먼저 샀다. 그 뒤로는 따뜻한 조명을 밝혀줄 스탠드를, 그리고 푹신한 러그를 샀다.


사무실같이 딱딱해 보이던 공간에 하얗고 포근한 이불을 처음 씌웠을 때, 푹신한 러그를 깔고 주황빛이 도는 조명을 켜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의 취향이 입혀진 공간에 산다는 일이 그렇게 행복한 것인지 그때 알았다. 계절이 바뀌면 소품들을 바꿨다. 봄에는 화사한 잔꽃무늬 이불을 샀고, 가을에 코코아색 체크무늬 이불을 샀다. 그리고 겨울엔 추운 외풍을 막아줄 난방 텐트를 사서 캠핑하는 듯한 기분을 냈다.


새하얀 이불, 주황빛 조명, 푹신한 러그 그리고 난방텐트까지!


이 곳에서 난 틈틈이 자주 행복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블루투스 스피커로 라디오를 켤 때, 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디제이의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할 때,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나와 모든 백색 등은 끄고 따뜻한 주황빛 조명을 켤 때, 좋은 향이 나는 디퓨저를 곁에 두고 편한 의자에 앉아 책을 읽을 때, 그렇게 책을 읽다가 조용하고 감미로운 피아노곡을 들으며 잘 준비를 할 때, 그렇게 매일이 순간순간 행복했다.


관사에서는 2년 동안만 지낼 수 있었다. 나처럼 지방에서 발령받아 올라오는 후배들을 위해 집을 비워줘야 했다. 앞으로 지낼 집을 다시 알아봤다. 관사 밖의 현실은 한층 더 혹독했다. 역세권, 적어도 10평 남짓, 전세금은 최대 7천, 남향 등등의 조건을 다 맞추는 건 불가능했다. 맘씨 좋으신 부동산 아저씨와 20여 군데의 발품을 팔아 겨우 비슷한 조건의 집을 찾았다. 관사에 살 때는 관리비만 따로 내면 됐었는데, 이제는 전세대출금 이자와 함께 약간의 월세와 관리비까지 내야 했다. 들어가는 돈은 늘었는데 공간의 평수는 훨씬 줄었다. 겨우 7평 남짓한 방에 싱글 사이즈 침대 하나, 1인용 소파 하나 들어오니 방이 꽉 찼다.


관사에서도 최소한으로 가구, 소품을 샀다고 생각했는데 이 집에선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던 테이블은 접어서 벽에 세워뒀고, 겨울에 바람을 막아줬던 난방 텐트는 접어서 옷장 속에 숨겨뒀다. 나중에 큰 집으로 이사 가면 다시 쓸 욕심으로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었다. 요즘 날씨가 영하권으로 떨어지다 보니, 집이 유난히 추웠다. 관사에서 쓰던 난방 텐트를 꺼내 펼쳤다. 역시나 이 좁은 집에 펼쳐놓기엔 너무 컸다. 중고거래 어플을 켰다.


우풍이 심했던 집에서 사용했던 난방 텐트입니다.
이사 온 뒤로는 사용하지 않아서 올립니다.



첫 나의 자취방은 10평쯤, 2년 뒤 나의 두 번째 자취방은 7평쯤 된다. 줄어든 평수 때문이었을까, 흘러간 시간 때문이었을까. 집을 꾸미며 열심히 나를 가꾸던 열정이 시들해졌다. '나의 공간'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결국 '나'에 대한 고민이다. "평수가 작아져서, 결혼하기 전에 잠시 사는 집이니까, 어차피 잠만 자는 공간이니까"라는 핑계들을 앞세워 이사 온 뒤로는 대충 지냈다. 당장 필요한 것인데도 '다음에 할 이사'를 위해 없는 대로 지냈다. 사고 싶은 그릇도 '언젠가 할 결혼' 뒤에 사야지 생각했다. 소소한 소품들로 집안을 꾸미는 일도 '피곤'의 핑계 뒤로 미뤘었다.


추운 날씨 덕에 난방 텐트를 중고 어플에 올리자마자 구매를 원한다는 채팅이 왔다. 옷장에 숨겨두기만 했던 난방 텐트가 제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새로운 주인에게 넘겨줬다. 난방 텐트를 팔고 나는 마트에 갔다. 창문에 붙여둘 뽁뽁이, 창문 틈을 막아줄 두꺼운 스티로폼 등 각종 방한용품을 샀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는 큰 난방 텐트 대신 창문의 틈을 막아줄 뽁뽁이가 더 유용했다. 그 뒤엔 이불 커버를 극세사로 바꿨다. 그리고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리고 바닥도 닦았다. 보기 싫게 벗겨진 장롱 벽 위엔 패브릭 포스터를 덮어줬다. 냉장고에는 좋아하는 엽서들을 알록달록 붙여줬다. 그리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좋아하는 향수를 잠옷에 뿌리고 좋아하는 의자에 앉았다. 행복하다.


집을 꾸미기 시작하면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해지는 일이다. 나만의 공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애정을 쏟는 일은 내 삶을 더 단단하게 해주는 일이다. 두 번째 자취방에서의 삶도 단단하게 채워지길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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