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

2020년 12월의 어느 날, 작성 글

by 오오리

서른 초반의 나이는 뭔가를 시작하기에 늦지 않은 나이 같지만, 당장 생계가 불안한 내게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얼른 다시 취업을 해서 돈을 벌어야 그동안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전에 썼던 이력서와 자소서를 수정하고 취업사이트를 뒤적이며 초라한 이력서와 자소서를 제출하였다.

봐줄 만한 건 학벌뿐이다. 학부시절 취업생각은 조금도 없고 고시를 볼 생각밖에 없었기에 학점관리에 힘쓰지 않았다. 자격증을 취득하여 졸업할 수 있는 정도로 맞춰놓았을 뿐이다. 그래놓고선 시험 준비는 뒷전으로 하고 갑자기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였고, 요상한 바람이 불어 휴학을 2년 하더니 다시 대학원 복학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시험을 보기 싫다는 생각에 고시 준비할 생각을 접어버렸다.


다시 말하자면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다. 저러고선 대학원을 졸업하여 해당 분야로 진로를 설정한 것도 아니다. 대학원의 전공은 나와 정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굳이 졸업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여전히 수료상태로 남겨놓은 상황이다. 정말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다. 이렇다 내세울 경력도 없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그렇다고 지난날의 선택들을 후회하진 않는다. 당시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을 했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했었다. 물론 늘 하고 싶은 것만 선택할 수는 없었기에 그에 대한 미련도 조금은 남아있다. 그래도 여전히 후회는 없다.

과거의 내가 쌓여서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것일 텐데, 그럼 나는 도대체 뭐가 문제였기에 지금의 내가 이렇게 무력하게 있는 걸까. 그게 가장 큰 미스터리다. 번아웃이 되었나. 근데 내가 그렇게까지 힘겹게 살았었나? 다른 누구와 굳이 비교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사람마다 갖고 있는 에너지가 다르니. A가 100의 일을 해서 번아웃이 온다고 해서 B도 100만큼을 해야 번아웃이 오는 건 아니다. 그는 200의 일을 하고 나서 번아웃이 올 수도 있는 거고 50만큼만 해도 번아웃이 올 수 있는 거다. 나는 어디쯤일까. 확실히 평균이하라고 생각한다.


평균 이하의 에너지밖에 갖고 있지 못하는 건 체력의 문제도 크다. 근데 그뿐만이 아니다. 예민한 것도 한 몫할 것이다. 3n 년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내가 꽤나 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원가족 중에 나보다 더 예민한 기질의 사람이 있는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예민함이 나에겐 익숙하니, 그에 비하면 나는 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둔하디 둔한 나의 짝꿍도. 지금 함께 삶을 나누는 짝꿍에게 '내가 예민한 사람이더라고'라 하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민한가? 잘 모르겠는데.'

나보다 더 둔한 사람이라 나의 예민함조차 인지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사람이 너무 좋아 예민한 게 아니라고 해주는 건지. 연애하던 시절에도 그랬다. 내가 조금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아서 미안해하면 그는 늘 '예민한 게 아니라 내가 잘 몰랐던 거야. 괜찮아'라고 말해주곤 했다. 난 이게 사람이 좋아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쩌면 정말로 둔한 성격 탓에 나의 예민함을 몰랐던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 성격은 굉장히 물렁물렁 동글동글하다. 단단한 찰흙에 여기저기 가시가 잔뜩 박힌 것과 같은 나와는 다르게 동글동글한 슬라임 같은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굳은 심지를 지닌, 정말 좋은 사람이다. 물론 그런 사람도 당연히 서운해하고 속상해한다.

그러고 보니 언제였는지 무슨 상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그날은 내가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고 그는 아주 사소하고 조그마한 잘못을 했었을 거다. 평소라면 잔소리 좀 하고 말았을 일인데 아마 꼬리를 물고 물며 계속 물어뜯었던 날이었을 거다. 그는 울먹이며 '오늘 완전 고슴도치 같아. 아니 고슴도치도 아니야 꼬씀또찌야!'라며 내게 말했고 그 모습에 아마 화가 풀려서 미안하다고 하며 사과했었다 꼬씀또찌같은 나의 모습도 그가 품어주고 다독여주어서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는 많이 둥글어졌을까? 잘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내가 성격적으로 모난 부분이 있고 착하지 못할 뿐, 예민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믿고 싶었던 수도 있겠다. 옷에 붙어있는 태그가 신경 쓰여서 모조리 떼어내거나. 약간의 이물감도 불편해서 신경 쓰는 등 촉각에 예민한 편이다. 거기에 조금의 스트레스 상황에도 소화를 잘 못 시키는 사람이 자신을 둔하다고 생각한다니. 이보다 더 멍청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으로 나를 착각할 수도 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 그 착각 속에서 사는지, 착각임을 깨달았을 때 그 착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인정해야 한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고 싶다.

화요일 연재
이전 01화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