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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Nov 14. 2017

첫눈 오던 날

그리고 기나긴 시카고 겨울의 시작

지난주 금요일,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하얗게 첫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전날 까지만 해도 첫눈이 오리라고는 예상을 못했던 날씨라서 더 놀랍고 반가웠지요. 11월에 시작해 내년 5월은 되어야 끝이 나는 긴긴 겨울이 이제 막 시작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아이와 저는 아침에 눈이 쌓인 것을 보고 신이 났습니다. 마침 며칠 전 아이가 진저브레드 하우스를 만들어서 장식을 해두었는데 이렇게 첫눈이 오는 날 이렇게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소품이 집에 있으니 정말 마음이 들썩이는 연말이 온 것 같았습니다.



밖에 눈이 쌓인 것을 보고 아이는 학교 갈 생각은 안 하고 빨리 밖에 나가서 눈을 가지고 놀자고 졸라댔습니다. 하필 이 날 아이와 저 둘 다 그 전날 늦게 자는 바람에 등교 시간을 30분 코 앞에 두고 눈을 떴지요. 아이를 씻기고, 옷 입히고, 밥 먹이고, 또 학교 가는 길 내내 50센티에 한 번 씩 멈춰 서서 장난거리를 찾을 것을 감안하면 30분은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예 이 날은 선생님한테 한 시간 지각을 하겠다고 이메일을 보내버렸습니다. 그렇게 우린 아침에 한 시간 동안 첫눈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지요.



눈 오는 날 학교 가는 길 아이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 보다 느립니다. 장갑을 벗어서 손가락으로 눈을 콕 찍어서 '으음, 맛있다!'라며 맛을 음미하기도 하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직접 맛보기도 합니다. 방수가 안 되는 장갑이라 눈을 만지면 손이 얼어붙는다고 경고를 해도 말을 안 듣던 아이는 정말로 장갑이 다 젖어서 손이 얼음장이 된 뒤에야 '추워, 추워'를 연발합니다. 역시 이 나이 때의 아이는 자기가 직접 경험해서 이 세상을 알아가는 게 제일 확실하고 효과적입니다.


이 날 첫눈은 처음에는 조용히 내리다가 그다음에는 세차게 눈이 내렸습니다. 여름에 이파리에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말이지요. 눈이 많이 올 때는 나무 수풀에 들어가서 눈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잠시 뒤에는 또 눈이 잠잠해지기도 했습니다.



아직 공원의 나무와 꽃들은 늦가을인데 그 위로 겨울이 살포시 내려앉았습니다. 이제 얼마 뒤면 부지런한 공원 정원 관리사 아저씨들이 시들어버린 꽃도 다 뽑아버리고, 나무도 정리를 하고, 겨울맞이 채비를 하겠지요. 여기에서 지내다보면 가끔은 시들면 시든 대로, 봄에 다시 겨울잠을 자고 깨어나는 화단의 꽃들을 볼 수 있는 한국 우리 집의 마당이 그립기도 합니다. 여기 공원은 조경에 완벽을 추구하는 계절에 따라 공원 전체의 꽃들을 새 꽃으로 심어버리기 때문에 가끔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처럼, 동물처럼, 꽃도 활짝 펴가고, 나이 들어가고, 또다시 새 생명이 태어나고 하는 그 순환의 자연스러움이 정말 아름다운데 말이지요.



집에서 보통 10분이면 걸어가는 유치원까지 이 날은 거의 1시간이 걸려 도착했습니다. 아이도 이젠 유치원 가는 걸 제법 좋아해서 유치원 근처에 가면 마치 N극이 S극에 달려가 따라붙는 것처럼 자기가 알아서 학교에 들어갑니다. 만족스러울 만큼 첫눈 오는 날 실컷 놀았던 덕분인지 뒤도 안 돌아보고 들어갔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는 이 아침 시간이 엄마에게는 사실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아이를 학교에 들여보내고 천천히 산책하며 돌아오는 길에서 영화 속에 나올 법한 이쁜 장면을 발견해서 사진을 찍어두었습니다. 여름 내 이쁘게 피었던 분홍 장미에 하얀 눈이 배경이 되어 쌓인 것이지요. 이제 이 꽃들도 모두 져버리고 나면 우리 식구는 세상에서 제일 추운 계절을 맞이해야겠지만, 또 그만큼 우리 집안은 따뜻하고 포근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카고의 긴긴 겨울이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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