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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알록달록 가을 숲으로

by Silvermouse

거의 평생을 서초구민으로 살아왔던 저는 부끄럽게도 청계산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지난주에 좀 마음이 속상한 일이 있어서 이럴 때일수록 생각 그만하고 몸을 써보자란 생각에 무작정 지하철을 타고 청계산 입구역까지 갔지요. 평소 같으면 청계산 입구에서 도토리묵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저지만, 그 날은 웬일로 청계산 옥녀봉까지 올라갔다 왔어요. 사람들이 왜 등산을 하는지 알게 되었죠. 집에 있었으면 하루 종일 내 머릿속을 떠다녔을 안 좋은 생각들이 한 방에 싹 사라졌으니까요. 그리고 얼른 또다시 등산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단풍이 다 져버리기 전에요.



일요일이었던 어제 오후, 또다시 출장을 떠나버린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아빠가 떠나니 아빠가 보고 싶어”라고 얘기하는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줄까 고민을 하다가 청계산 단풍을 보여주면 좋겠다 싶었어요. 지난주 내내 감기로 고생한 덕분에 집 밖에 나가지 못했는데 아직 감기 기운이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이제는 실내에만 있는 것보다는 밖에서 뛰어놀면 더 좋겠다 생각이 들었지요.


워낙 자연을 좋아하는 아이라 단풍이 든 산 입구에 들어가자 신이 났습니다. 나뭇가지를 주워다 물장난을 치기도 하고, 도토리 껍질도 모으고, 낙엽 가면을 만들어 한참을 놀았어요. 숲 속에서 아이가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한국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희가 사는 시카고는 다 평지기 때문에 이 정도의 산을 오르려면 집에서 차로 두 시간 정도는 가야 나오거든요.



얼마 전에 친구에게 청계산 숲 유치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렇게 좋아하는 아이를 보니 한 번 보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알파벳 하나 더, 숫자 하나 더 배우는 거보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뛰어놀고 즐거움을 느끼는 게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아이의 상상력은 엄마의 머리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집에 가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단풍잎을 몇 개 주워오더니 아이는 제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이에 혼자서 쓱싹쓱싹 종이에 저렇게 재밌는 그림을 그려와 선물해주고 갔습니다. 단풍잎 모양을 본을 떠서 그 모양 위에 재밌는 상상의 동물들을 그린 것이에요. 얼마 전까지 동그라미, 세모, 네모만 겨우 그리던 아이였는데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더니 얼추 눈, 코, 입도 있는 형상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눈에는 이런 것도 신기하고 기특하기만 하지요.



앞으로 아이를 어디에서 계속 키우게 될지에 따라, 그리고 아이가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부모 된 입장에서 제 마음은 요동을 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3살 아이를 키우던 지금의 제 마음이 오랫동안 간직되었으면 좋겠어요. 살짝 남아있는 감기에 아이를 소아과 대신 숲에 데려갈 수 있는 용기 같은 것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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