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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Mar 01. 2020

미국 유치원의 지각 가격표

당근과 채찍, 두 가지 얼굴 인센티브의 숨겨진 부작용

최근에 영국 런던으로 사내 트레이닝을 다녀왔다. 여기선 전 세계에서 모인 컨설턴트들이 리더십, 경영 원론 혹은 최신 경영 트렌드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된다. 재밌는 토픽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조직관리, 성과 장려, 매출 증진 등을 위해 기업들이 흔히 사용하는 인센티브 그리고 이 '당근과 채찍'의 위험한 부작용에 대해 배운 게 인상 깊었다. 수업을 다 듣고 보니 이미 내 생활 속에서도 수많은 '당근과 채찍'의 부작용이 있었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채찍의 부작용 - 데이케어 지각 가격표

"어쩌지? 차가 엄청 막히네. 오늘 윤서 픽업 늦을 것 같은데 데이케어(어린이집)에 전화해야겠다." 오랜만에 하루 평일 휴가를 낸 나는 와이프와 서버브로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갔다 유치원에 간 아이를 데리러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앞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고속도로가 꽉 막혀 차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아이에게 유치원이 문 닫는 시간까지 엄마, 아빠가 나타나지 않는 건 공포스러운 일이리라. 아이가 느낄 그 기분에 다다르자 내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시달리고도 퇴근을 못하실 선생님들을 생각하니 왜 더 진작 출발하지 못했을까 죄책감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도로 위에 차를 버리고 뛰어가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퇴근 시간을 지나 지각한 부모가 도착할 때까지 아이를 돌봐줬던 고마운 선생님


길이 조금씩 뚫리기 시작하자 난 최선을 다해 데이케어를 향해 엑셀을 밟았다. 그런데 와이프가 데이케어 선생님과 전화통화를 하는 내용을 엿들으며 나의 마음은 마법처럼 편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아이는 선생님과 둘이 잘 놀고 있다고 하셨다. “지각 시 벌금은 얼마죠? (How much is the late fee?)" 5분 지각에 20불(약 2만 원), 그리고 조금씩 더 늦을 때마다 벌금은 높아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데이케어 하루 비용을 계산하면 약 100불(약 10만 원) 정도인데, 5분 지각에 그 정도 벌금은 좀 과하다 싶은 액수인데, 이상하게 난 그 벌금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각을 했으니 벌금을 내야 된다는데, 왜 내 기분은 그랬을까?


지각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 벌금 제도는 지각을 하기 위한 금전적 가격표처럼 다가왔다. 지각을 하기 위한 금액을 지급하면 되니, 이제 나에겐 '지각할 권리'가 생긴 것 같았다. 마치 면죄부를 사듯 말이다. "조금 늦어도 괜찮아. 벌금 내면 되니깐." 이런 생각에 죄책감이 줄어들며 나는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운전 속도를 줄였던 것 같다. 그런데 런던 트레이닝을 통해 이러한 심적 변화는 나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제학자 Uri Gneezy와 Aldo Rustichini는 2000년에 '벌금은 가격표 (A Fine is a Price)'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사실 이건 완전 나의 이야기였다. 이들은 데이케어들로부터 협조를 받아 '지각 시 벌금' 제도의 효과를 테스트했다. 일반적인 경제, 경영학 논리에 따르면 벌금 제도는 지각을 억제하는 인센티브로 작용하여, 벌금 제도가 시행된 데이케어의 부모 지각률이 감소해야 했다. 그런데 실험 결과, 반전이 일어났다. 평상시와 동일하게 벌금 제도 없이 운영되던 데이케어들에선 10%대의 지각률을 관찰한 반면, 벌금 제도를 도입한 데이케어들에선 부모 지각률이 2배로 급증하여 20%대로 치솟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왜일까? 내가 만약 이 수업을 아이가 없는 총각 시절에 들었다면 진짜 궁금했을텐데, 난 이 경제학자들의 실험 결과를 보고 '그럼, 그럼'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형적인 채찍의 부작용이다.


본 실험 결과 '지각 시 벌금'을 물린 데이케어(파란색)는 지각하는 부모 비율이 20%대로 상승한 반면, 벌금이 없는 데이케어(주황색)는 지각률이 10%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부작용은 네거티브 인센티브인 벌금과 채찍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포지티브 인센티브인 당근 및 보너스에도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있을까? 우리는 보너스와 같은 포지티브 인센티브들 또한 검토해 보았다.


당근의 부작용 - 헌혈하시면 영화관람권을 드립니다

대부분 최근 뉴스를 접했을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며 전국 혈액 보유량이 '심각/경계' 단계까지 줄어들었다는 보도를. 단순한 시장경제/경영학 논리에 따르면, 인센티브를 확대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와 대한적십자에선 평시 제공하고 있던 영화관람권 외 추가적인 금전적 인센티브는 내걸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랬을까?


대한적십자사는 금전적 대가가 아닌 우리의 도덕성에 의존하고 있다


경제학자 Carl Mellstrom과 Magnus Johannessen은 2008년 헌혈 참가율에 관한 연구결과에서 포지티브 인센티브가 미치는 영향을 발표했다. 헌혈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을 3개 그룹으로 나눠 각기 다른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첫 번째 그룹은 안내문만 제공할 뿐 그 외 어떠한 인센티브도 제공하지 않았다. 두 번째 그룹은 헌혈 시 $7 정도의 현금 지급 인센티브를 제공했고, 세 번째 그룹은 같은 금액을 기부할 권리를 제공했다.


포지티브 인센티브에서도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성의 경우 금전적 인센티브를 받은 그룹의 헌혈 참가율이 가장 저조했는데, 헌혈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금전적 가격표를 붙이는 순간, 순수한 도덕적 가치와 만족도를 억제하는 부작용을 낸 것이다. 반면 남성의 경우 금전적 인센티브가 헌혈 참가율을 약 10% 끌어올리는 효과를 냈다. 성별에 따라서도 인센티브가 미치는 영향이 다른 것이다.


헌혈 인구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어떤 전략을 써야 될까?


'당근과 채찍' 인센티브: 사용해도 될까?

대부분의 기업은 '당근과 채찍' 인센티브제도를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위 사례들은 이러한 연간 인센티브 제도의 효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 단기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A 해주면 B 줄게' 같은 인센티브는 장기적으로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팀장으로서 팀원에게 "내가 밥 사줄게. 이번만 참고 야근하자."와 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은 야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만들어, 장기적으로는 팀원들의 의기를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대신 "중요한 보고가 있으니, 그때까지만 힘내자."와 같은 야근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선 포스팅에서 초보 팀장으로서 나 자신은 팀원들에게 동기부여를 어떻게 해왔는지에 대한 경험담을 얘기했었다(나의 초보 팀장 고군분투기). 이 런던 트레이닝에서 배운 내용들은 내가 더 좋은 팀장이 될 수 있는 교훈으로 삼고싶다. 당근과 채찍을 주는 대신, 공감과 동기 부여를 하는 것 말이다. 그 과정은 더 힘들고 오래 걸릴 수는 있지만 결국은 이게 맞다라는 사실을 알 것 같다. 경영 컨설팅 일을 하다보면 누구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너무나 단순한 당근과 채찍을 제안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항상 그 이면엔 상상 이상의 부작용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 글을 쓴 사람 'Droneboy'는,

한국에서 스타트업과 경영 컨설팅을 경험한 후 미국 Chicago Booth MBA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미국 시카고에서 아내 'Silvermouse'와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으며, 경영 컨설팅 일을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한 때 작가가 꿈이었는데, 브런치를 통해 나의 일하는 이야기, 가족 이야기, MBA 경영 지식 소개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필명 '드론보이'는 드론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 저를 위해 아내가 만들어준 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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