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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May 28. 2020

미슐랭 3스타, 포장 판매됩니다

시카고 3스타 알리니아 포장 음식 경험기

3월부터 시작된 코로나로 인한 미국의 셧다운이 예상보다 훨씬 더 길어지면서 이젠 예전이 어땠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요즘, 서서히 이 긴 터널의 끝이 보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예정대로만 잘 진행된다면, 6월 4일부터는 식당이나 상점들, 관공서도 문을 연다고 하니까요.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국은 주 단위로 셧다운을 할 지 말 지, 언제 제한을 풀지를 결정하기 때문에 미국의 몇 몇 도시들은 지난 주부터 제한적으로 문을 열기도 했어요. 하지만 뒤늦게 코로나가 확산되기 시작한 시카고가 있는 일리노이주는 아직이에요. 여전히 식당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테이크아웃이나 배달만 가능하게 되어있죠. 3월 초에 시작한 셧다운이 2주 정도면 풀리겠지, 조금만 힘내서 버텨보자 싶었던 식당과 상점들도 이제 석 달을 향해가니 각자 살 궁리에 나섰습니다. 이젠 온라인이나 전화로 주문하고 가게 앞에 가면 비대면으로 트렁크에 물건을 실어주는 Curbside Pick up이 일상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식당 앞에 차를 세워놓으면 직원들이 나와서 트렁크에 안전하게 주문한 음식을 실어준다.


레스토랑 업계에도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콧대 높은 미슐랭 레스토랑들도 포장 서비스를 시작했거든요. 심지어 시카고의 가장 대표적인 3 star 미슐랭 식당인 그랜트 애커츠(Grant Achatz) 셰프의 알리니아(Alinea)에서도 말이죠! 아마도 시카고에서 가장 비싼 식당일 이 곳은 가격도 가격이지만, 예약이 힘들어 몇 달 전부터 자리를 예약해야되요. 저도 사실 이 곳은 아직 가보지 못했고, 언젠가 있을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두었죠. 이미 다녀와본 친구들 얘기로는 알리니아만의 독특한 퍼포먼스와 예술 작품을 활용한 연출이 감동을 준다고 해요. (사실 나중에 스포일러가 될까봐 더 자세히는 안 물어봤지만요) 



알리니아가 하는 포장 음식은 도대체 뭘까 궁금하던 차에 그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바로 제 생일이 5월달이거든요. 생일이지만 어디 밖에 나갈 수는 없고, 또 이 특별한 날을 그냥 보통의 날처럼 흘려보내기는 섭섭하던 중에 남편이 알리니아를 주문해보자는 재밌는 제안을 했습니다. 특히 요즘 요리의 재미에 푹 빠져있는 남편은 이 세계적인 미슐랭 식당의 음식을 '플레이팅'하는 영광을 누리고 싶어했죠. 비록 알리니아의 멋진 퍼포먼스는 못보겠지만, 평소라면 와인 패어링된 테이스팅 메뉴 가격의 1/10 수준으로 알리니아 음식을 맛볼 수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그래서 생일 저녁에 맞춰 미리 예약을 하고 직접 식당에 가서 픽업해왔습니다.


큰 갈색 종이 봉투 안에는 차곡차곡 음식들이 포장되어 있는데요, 포장 용기는 그냥 일반 식당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플라스틱 그릇이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에이, 3스타 레스토랑도 별거 없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날의 메뉴 주제는 '15주년 생일 파티'로 총 6가지 코스로 구성되어있었죠. 용기에서 꺼내 그대로 그릇에 올리면 되는 차가운 음식도 있지만, 나름 약간의 조리 과정을 거쳐야하는 핫디시들도 있었습니다. 포장 예약을 한 사람들에게는 미리 이메일로 어떻게 '알리니아의 요리에 직접 참여'할 수 있을지 자세한 안내문을 보내줬죠. 어떤 메뉴는 오븐에 한 번 구워야 되는데 그 전에 오븐 안을 한 번 훈연해서 그 연기로 독특한 향이 배일 수 있게끔 특별한 향신료와 재료가 들어있기도 했습니다. 설명서를 제대로 안 읽었으면 그 훈연 재료를 그냥 먹어버릴 뻔 했지요! (Alinea 15th Anniversary 메뉴와 조리 방법)



사실 미슐랭 음식 맛으로 먹는 것보다 눈으로 먹는게 더 크지 않나,라며 큰 기대 없이 첫 스푼을 뜬 저도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맛있었어요. 각 포장 용기 위에는 음식 이름과 어떤 재료들이 들어갔는지 친절하게 써있었는데 상상했던 재료들을 찾아가며 맛을 느낄 수 있었죠. 물론 식당에 가서 먹으면 그 감동이 배가 되었겠지만, 그래도 다섯 살 첫째 딸, 그리고 갓난쟁이 둘째 딸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인 다이닝을 집에서 (간접) 경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잊지못할 저녁 식사였습니다. 


남편과 딸이 준비해 준 알리니아 15주년 메뉴의 재해석


이 날 가장 인상깊었던 코스는 마지막 피날레인 디저트. 지금의 알리니아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디저트는 그냥 일반 접시에 플레이팅 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방에서 직접 셰프가 나와서 테이블을 하나의 캔버스로 그 위에 멋진 그림을 그려주는 퍼포먼스를 하지요. 그런데 이런 퍼포먼스를 집에서 직접 해볼 수 있도록 모든 음식 재료들과 함께 테이블 위에 깔 수 있는 투명 아크릴지까지 들어가있었어요.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우리집 꼬마 아티스트에게 몇 개 유튜브를 보여주니 영감을 받았는지 제법 그럴싸하게 쓱쓱 디저트 작품을 만들어줬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기웃거리며 그 디저트 그림 다시 해보고 싶다는 걸 보니 아이에게도 잊지못할 경험이었나봐요. 



https://www.youtube.com/watch?v=GRCx-3--wgI


아마 앞으로 며칠 후, 시카고도 굳게 걸었던 빗장을 서서히 풀게 되면, 이런 미슐랭 레스토랑 음식을 집에서 먹어보는 특별한 경험도 추억으로 남겠죠? 모든 계획이 뒤엉켜 한치 앞 날을 예측할 수 없는, 혹은 그 날이 그 날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갔던, 잊지못할 2020년 봄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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