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lvermouse Oct 02. 2020

옐로스톤에선 서바이벌 안 해도 됩니다

옐로스톤 캠핑 여행기

이번에 옐로스톤을 가서 놀란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곳은 ‘만약 원한다면’, 디즈니월드의 리조트처럼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에요. 이번엔 저희가 처음부터 옐로스톤을 가서 전 일정 캠핑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공원 안에 무슨 숙박 시설이 있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옐로스톤에 가서 서바이벌 할 생각 뿐이었죠. 옐로스톤을 지금 이 시기에 가게 된 이유도 이제 한국에서 곧 돌이 되는 둘째가 미국에 들어오면 한동안 이런 힘든 여행은 떠나지 못할 테니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서였죠.


옐로스톤 내셔널 파크는 정말 무지하게 커서 동서남북으로 입구가 모두 있어요.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데만도 거의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리고, 내셔널 파크를 차로 한 바퀴 빙 둘러보는 데만도 세 시간 이상이 걸리죠. 옐로스톤 안에서는 인터넷이 전혀 잡히지 않기 때문에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되는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워요. 공원 입구에서 나눠준 지도 한 장이 유일한 이정표인 순간이 많죠. 하지만 길이 복잡하지 않고 마치 놀이동산 지도처럼 쉽게 구획이 나뉘어 있어서 몇 시간만 헤매 보면 금방 감을 잡을 수 있어요. 첫날 저희는 '내셔널 파크는 원래 깊은 산속이라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가져간 비상식량도 동이 날 수 있으니 아껴 먹어야겠다'면서 완전 서바이벌 게임처럼 지냈죠. 그때까지만 해도 우린 진짜 야생에 있다 믿었거든요!


그 어디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9월 말의 춥디 추운 옐로스톤의 밤. 캠프파이어의 불은 낭만이라기 보다는 생존 도구에 가깝다.


아, 그런데 다음 날 오후, 우린 이 곳의 진실을 알아버렸습니다. 옐로스톤은 우리처럼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아주 편안하고 쾌적하게 여행을 즐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 날 우리는 90분마다 한 번씩 땅에서 물을 내뿜는 걸로 유명한 올드 페이스풀(Old Faithful)을 구경하러 가기로 했어요. 우리가 지내던 캠핑장에서 차로 불과 20분 정도 떨어진 곳이었죠.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올드 페이스풀을 둘러싸고 너무나도 멋진 통나무 호텔이 오아시스처럼 나타났습니다. 바로 Old Faithful Inn이었죠. 그제야 인터넷이 잡혀 검색을 해보니, 이 호텔은 미국의 건축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유명한 곳이었어요. 입장 인원을 제한하고 있어서 아쉽게도 제대로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문명 세계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죠.

 

처음 생겼던 1900대 초반의 Old Faithful Inn. 지금도 옛 모습 거의 그대로.


호텔 앞에는 큰 상점이 있어서 들어가 봤는데, 우리가 도대체 왜 시카고에서부터 그렇게 바리바리 짐들을 싸들고 왔을까 후회가 될 정도로 거의 캠핑에 필요한 모든 식료품들이나 캠핑 용품들을 다 구비하고 있었습니다. 옷들도 그냥 이름 없는 관광용이 아니라 파타고니아, 콜롬비아, 팬들턴 등 캠핑족들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들이 거의 다 들어와 있었어요. 심지어 옐로스톤 스페셜 에디션으로 말이죠. 혹시나 다음번에 제 친구가 이 곳을 여행하게 된다면 그냥 준비물 챙기느라 스트레스받지 말고 가볍게 지갑만 들고 가라고 얘기해줘야겠다 싶었어요. 심지어 이 곳 아이스크림집에서 먹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제가 미국에 와서 먹어본 아이스크림 중에 제일로 맛있었어요. 우린 이런 줄도 모르고, 가져간 물도 동날까 아껴먹었다니. 너무 순진하게 옐로스톤에서의 생존을 위해 의기투합했던 우리 지난밤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도 났지만 또 한 편으론 ‘뭐야,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잖아’란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만큼이나 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할머니에게 사진을 보내드리니 “나도 십 년 전 즈음에 친구들이랑 옐로스톤 갔었는데, 그때 그대로 다 있으려나” 하셨어요. 할머니 지금 나이가 거의 아흔 정도이니, 7,80대 할머니들까지도 충분히 옐로스톤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 모두 각자만의 방법으로 말이죠. 옐로스톤을 나오면서 전 남편에게 “다음 번에는 난 여기서 제일 좋은 호텔에서 지내면서 편안하게 여행해보고 싶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은 “그래, 너는 거기서 자고 그럼 난 윤서랑 캠핑할게”라고 하더라고요. 과연, 남편은 다음번에 이 멋진 통나무 호텔을 두고 매서운 바람이 부는 캠핑장으로 또 향하게 될 수 있을까요? 모르면 몰랐지 알고는 두 번은 못할 것 같은데요, 전!


옐로스톤에 이런 리조트 휴양 시설들이 들어와 있는 걸 뒤늦게 깨닫고 처음엔 솔직히 좀 실망한 것도 사실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셔널 파크이기 때문에 정말 누구나 와서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젊은 백패커들은 불빛 하나, 인터넷 한 번 연결되지 않는 캠핑장의 별 밤 아래에서 잠들고, 0살부터 100살까지 가족 단위의 여행자들은 이 멋진 통나무 랏지에서 운치 있는 옐로스톤을 즐길 수 있을 테니까요. '꿈 속에서나 옐로스톤을 다시 한번 가보려나!'라고 얘기하시던 할머니의 꿈을 언젠간 실제로 이뤄드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옐로스톤의 Old Faithful Inn 호텔:

https://www.yellowstonenationalparklodges.com/connect/yellowstone-hot-spot/old-faithful-inn/ 

가을 단풍이 시작되는 9월 말이 되면 옐로스톤 안의 캠핑장은 하나 둘 문을 닫는 반면,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수는 늘어나기 때문에 일찍 호텔 예약을 서둘러야 합니다. 옐로스톤 안에는 이 곳 말고도 곳곳에 열 개 정도의 호텔이나 Inn이 있는데, 아늑한 산장 같은 곳도 있고, 모던한 곳도 있어요. Old Faithful Inn은 1903-1904년 경에 지어졌는데,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죠. 이 호텔은 옐로스톤에서 나온 돌과 나무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옐로스톤의 호텔들은 4계절 다 오픈을 하는 게 아니라, 여름 호텔, 겨울 호텔로 나뉘어 운영돼요. Old Faithful Inn의 경우, 7월 말에 오픈해서 10월 초면 문을 닫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살아있는 동물원, 옐로스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