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 성 프란체스코 축일
시카고에도 이제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어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우리 집 작은 베란다에 나가 커피를 들고 잠깐 앉아있는데 제 아침 리츄얼인데요, 그 풍경 안에 큰 나무 한그루가 있어서 계절 변화를 느낄 수 있어요. 지난달부터 조금씩 노란빛을 띠기 시작했는데 이번 주 들어서는 하루가 다르게 노랗게 변하고 있어요.
이런 날씨 탓인가, 오랜만에 성당을 한 번 나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시카고에 와서 한국 성당을 찾아 몇 번 나갔었는데 사실 거리도 꽤 멀고 주말에 항상 다른 일정들이 있어서 잘 나가지 못했거든요. 코로나 탓도 있고요. 그래서 한 번 용기를 내서 동네 가까운 미국 성당을 가보기로 했어요. 관심이 없었을 때는 몰랐는데 구글맵을 쳐보니 저희 동네에도 여러 개의 성당이 나오더라고요. 그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한 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어제 아침, 아이 둘의 등교를 엄마에게 부탁드리고 일찍 출근길에 아침 미사를 가봤어요. 아침 미사는 큰 성전이 아닌 작은 예배당에서 열리고 있었는데, 삐걱,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니 부지런한 대여섯 명의 신자가 신부님과 미사를 보고 있더라고요. 뉴페이스의 등장에 신부님이 잠깐 미사를 멈추시고 어서 들어오라고 환영을 해주셔서 마음 편하게 들어갈 수 있었어요. 사실 미국 성당은 처음이라 기도문도 전혀 모르고, 말씀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느낌이 좋았어요. 집 가까운 곳에 이런 곳을 발견했다는 게 기쁘기도 했고요.
출근 시간 때문에 미사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나오려는데, 신부님께서 오늘 저녁 6시에 동물과 자연의 수호성인이신,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축일 기념 Pet Blessing 행사가 성당 마당에서 열릴 예정이라고 안내해주셨습니다. 제가 '저는 Pet이 없는데 아이들과 가도 될까요?' 했더니, '당연하죠. 아이들이 당신의 pet이기도 하니까요!'라고 유쾌하게 대답해주셨죠. 퇴근을 하고 서둘러 아이들을 픽업해서 다시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바스락 거리는 가을 공기와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한 성당 마당에는 이미 강아지들과 그 가족들이 빙 둘러서 미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장할 때 각자 이름표에 강아지 이름과 자기 이름을 쓰는데, 저에게는 아이들 이름을 써주셨죠. 한 스무 가족이 모였나 봐요. 외동견을 키우는 가족도 있고, 강아지와 고양이를 같이 키우는 입양 가족도 있었죠.
미사가 시작되기 전에 신부님은 저희 첫째에게 오시더니 '오늘 미사에 나를 도와주고 싶니?'라고 물어보셨어요. 행사 참여하는 걸 좋아하는 첫째는 신이 나서 신부님을 따라다니며 옆에서 기도문을 들고 있는 귀여운 역할을 맡았죠. 신부님은 각 강아지 가정 앞에 무릎을 꿇고 축성을 해주셨어요. "이 작은 생명과 그 가족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까지, 서로 함께 기쁘고 행복하기를!" 신기하게도 마당에 모인 수 십 마리의 강아지들은 아무도 짖지도 않고 딱 가족 옆에 앉아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렸죠.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 모습은 정말 신기한 광경이었어요!
제게는 짱이와 쏠레라는 두 마리의 강아지가 있었는데요, 모자 지간이었던 둘은 제가 고 3이었던 시절에 우리 집에 들어와 첫째 딸이 3살 정도가 될 때까지 우리와 함께 지냈어요. 거의 20년 동안요. 사실 짱이와 쏠레의 노년 시절은 제가 미국에 와있었던 시기라 함께 하지 못했고, 두 달 간격으로 나란히 하늘나라로 떠난 소식도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듣게 되었어요. 제가 멀리서 혼자 놀랄까 봐 가족들이 한 배려였죠. 그래서 지금도 마지막 가는 길을 보지 못해서 어딘가 둘이 티격태격 잘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요.
성당 마당에 빙 둘러있는 강아지 식구들을 보면서 저도 마음속으로 축복했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Pet blessing 미사도 데리고 오는 좋은 가족들을 만난 동물들이 신부님 말씀대로 주어진 생명의 시간까지 가족들과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그래서 이들이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도, 짱이 쏠레가 제게 선물해준 것처럼 마음속으로 떠올릴 때마다 같이 했던 따뜻한 시간들을 떠올릴 수 있기를. 우연히 가을 날씨에 마음이 흔들려 가봤던 동네 성당에 이제 우리 식구들의 추억이 하나씩 더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