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변월룡 전
몇 년 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본 적이 있어요. 지난 세대 BMW 7 시리즈 런칭 출장이었으니 아마도 2012년이었던 것 같네요.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도시 전체가 하나의 큰 박물관이라고 불려지는 그 곳은, 유럽의 잘 관리된 여느 예술 도시와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최첨단 보안 장치와 새로운 기술로 무장한 프랑스의 박물관과는 달리, 오랜 시간 경제적 어려움으로 손을 대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을 전시관들에서 그 화려했던 러시아의 문화 위에 뽀얗게 덧입혀진 세월의 먼지를 볼 수 있었지요. 재개발이 되지 않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화려했던 건물들, 오랜 시간 가난을 이겨낸 도시의 모습, 그리고 전세계 브랜드들이 주목하고 있는 신흥 부자들, 그 모든 것이 뒤엉켜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만나지 못했던 그런 이국적인 모습을 간직한 곳, 그것이 제 러시아의 첫인상이었죠.
오늘 우연히 그 세월의 더깨를 쓱쓱 지워 다시 선명했던 그 러시아, 아니 구소련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바로 덕수궁에서 열린 한 미술 전시회에서였어요. 바로 구소련에서 활동했던 고려인 화가 '변월룡 전'에서였죠. 변월룡은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화가이자 교육자로 일생을 보냈습니다. 1990년, 정말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세상을 떠난 이 작가의 이름이 우리에게 이토록 낯선 이유는, 냉전이라는 역사의 긴 한 페이지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묻혀있는 보물 상자가 이제야 그 열린 것이지요. 그래서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합니다.
1916년부터 1990년이라... 변월룡이 살았던 그 시기는 아마도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셨던 때와 얼추 일치할 겁니다. 그 시기에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냥 감사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팎으로 격변의 시기였죠. 식민, 분단, 전쟁, 이념 대립이 있었던 한국의 근현대, 공산주의 혁명, 제2차 세계대전, 전체주의, 냉전, 개혁과 개방을 겪은 러시아 근현대사가 뒤섞여 매일 매일 역사에 한 문장씩을 남기던 그 시기가 바로 화가 변월룡이 활동을 하던 시기였지요. 그렇기에, 외로움, 향수, 고독,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 어둡고 축축한 단어들은 변월룡의 미술 인생을 표현해주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변월룡의 러시아 작업실 벽 정중앙에 20년이 넘게 걸려있는 이 초상화는 바로 작가의 어머니입니다. 고려인으로 남의 땅을 전전하며 살아온 노모의 삶의 흔적들이 어두운 배경으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모습 옆 바닥에 놓아져 있는 항아리는, 아마도 그런 고려인의 모습을 닮은 고려의 항아리일 겁니다. 변월룡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릴 때면, 완성된 작품 위에 그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고 해요. 이 초상화도 자세히 보면 한글 교과서에 나올 법한 필체로 꾹꾹 정성스레 '어머니' 세 글자를 써 놓은 것이 보입니다. 아마도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예쁜 글씨로 그 이름을 쓰고 싶었겠지요?
변월룡은 러시아에서도 자신의 한국어 이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러시아에서 산 고려인들의 경우에 러시아 이름을 사용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죠.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고독한 고려인 화가가 자신의 이름을, 고향 땅과 자신을 이어주는 마지막 끈이라고 생각한 때문인 걸까요. 자신의 묘비에도 '변월룡'이라고 한글로 이름을 남겼어요.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 변월룡의 생애에 대한 비디오를 상영하는데 그것을 보면 그의 생애와 사회적 배경이 더 잘 이해가 된답니다.
구소련에서 변월룡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가라고 평가를 받으며, 큰 명성을 누렸습니다. 물론 사회주의 영웅의 초상화도 많이 그리고, 포스터 작업도 많이 했지요. 고려인이라는 출신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어 현지에서 작가로 인정을 받은 변월룡은 어느 날 구소련 정부로부터 북한으로 가서 사회주의 회화를 전수하고 북한 미술의 기틀을 마련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게 됩니다. 그 당시 국민들에게 사회주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효율적인 도구가 바로 포스터, 노동 영웅 초상화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죠. 요즘에도 우리가 TV에서 보게 되는 북한 평양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이나 포스터는 바로 변월룡의 그림과 상당히 비슷해요. 바로 변월룡이 평양미술학교를 재건하며 기틀을 잡은 것이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겠죠. 그리고 이런 이유들로,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우리는 변월룡이란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겐 '냉전이 지워버린 화가'란 꼬리표가 따라붙기도 하죠.
제가 가장 좋았던 그림은 바로 중년의 모습의 최승희 무용수였어요. 젊은 시절 도도한 모습의 최승희를 사진으로 봐왔던 저는 다소 통통한 모습의 나잇살이 느껴지는 이 중년 여성의 넉넉한 모습이 이색적으로 보였답니다. 북한에서 활동하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이 무용수를 변월룡은 북한에 파견을 나가 있는 동안에 만날 수 있었죠. 이 외에도 다양한 북한의 문인, 예술가들과 만나 초상화를 그리고, 또 그가 러시아로 돌아간 이후에도 서로 편지로 소통하며 왕래했다고 합니다. 이 모든 작품들은 그의 특수했던 인생 경로 덕분에 지금 우리가 만나볼 수 있는 우리 근대사의 새로운 기록들이지요.
격변의 시기였던 그의 삶만큼이나 작품에 나오는 소재들도 정말 좋은 시절을 보내고 세상을 떠난 다른 화가들은 감히 그릴 수 없는 것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해방 당시의 모습, 휴전 회담 시기,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시각과는 다른 각도에서 기록한 역사들을 볼 수 있었지요. 15년 전쯤, 캐나다에서 만났던 한 모로코 출신의 제 친구가, 외국인들이 아랍의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CNN만 보지 말고, 알자지라 방송을 봐야 된다고 얘기를 한 것이 문득 생각이 났어요. 뭐 그다지 제가 관심이 있는 이슈가 아니라, 이후로도 한 번도 그 방송을 찾아보진 못했지만, 그 똑똑했던 친구가 해주고 싶었던 말은 뭐든지 편향된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우리의 지난 역사를 상상해볼 수 있었던 이 전시가 참 고마웠습니다. 제 머릿속에서 잠시 잊혀있던 그 친구를 다시 한 번 떠올려주게 했으니까요.
시간 연대기 순으로 구성되었던 이번 전시의 마지막 방은, 바로 변월룡이 노년에 그렸던 작품들이 있는 방이었습니다. 그 방의 이름은 '디아스포라(Diaspora·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 또는 그 거주지)의 풍경'. 구소련에서 화가로서 성공하고 가족도 이루었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던 시간들, 물과 기름처럼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없었던 땅에서 느끼는 외로움, 노스탤지어, 그리고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을 냉전 종식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이 세상을 떠난 이 안타까운 천재 작가의 삶을 곰곰이 되새겨볼 수 있는 방이었습니다.
하루하루 힘들다 지겹다 하지만, 벌써 이 만큼 와버린 인생, 답답하다 떠나고 싶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방인이 되지 않는 내 나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될 중년과 노년, 인생의 단계들과 언제나 밝고 즐거울 수만은 없는 감정과 시간들. 따뜻한 봄날의 소풍 같던 이 계절에, 변월룡 전이 이리도 깊게 제 마음 속에 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이것이 단순한 멋진 그림 전시회가 아니라, 결코 내가 다시 가보지 못할 이국적인 곳으로의 시간 여행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