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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Aug 30. 2016

아기와 가을맞이 꽃꽂이

유치원 때 이사를 왔으니 제가 살고 있는 이 곳 반포동 서래마을 주민이 된지도 30년이 넘었습니다. 나름 토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사실 요즘에야 프랑스 마을이라고 해서 괜찮은 식당, 카페, 베이커리, 공방 등이 들어섰지, 제가 스무 살 때만 하더라도 서래마을엔 스타벅스는커녕 변변한 카페 하나 없는 조용한 곳이었어요. 번잡한 것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골목 주차난도, 외부인들이 마을 공원에 나와서 큰 소리로 밤에 술 마시고 떠드는 것도 모두 마음에 안 들겠지만, 예전의 텅 빈 모습을 기억하는 저는 지금 이런 풍성한 문명적 혜택들이 더 좋아요.


정말 잠깐이었지만, 저희의 신혼집도 친정에서 뛰어서 30초 거리에 있는 20평 작은 아파트였고요, 그래서 제 모든 유년 시절의 추억과 사춘기와 사회 초년병 시절, 그리고 제 신혼을 알고 있고, 또다시 제 아기의 유년 시절을 기억해줄 이 곳을 전 정말 좋아한답니다. 이름도 정말 순박하니 이쁜 것 같아요. 서래마을, - 마을. 어디 시골 마을 이름 같기도 하고요.


그중에서도 제가 이 곳을 좋아하는 건 근처에 꽃시장이 있다는 거예요. 바로 고속터미널 꽃 도매 시장 말이죠. 꽃시장은 특이하게 밤 12시에 문 열어서 아침이면 문을 닫아요. 멀리 살았다면 아마 엄두도 못 냈겠지만, 전 가끔씩 수목 드라마가 끝나고 혼자 쓰윽 나가서 꽃시장 한 바퀴를 돌고 올 때도 있고, 아니면 어떤 날, 즉 회사 가기 엄청 싫은 그런 날은 출근 전에 한 바퀴 꽃구경을 하고 버스를 타러 갈 때도 있었어요. 꽃시장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급 혜택이죠.

오늘은 유난히 가을이 온 것 같은 하루였어요. 아침부터 찬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날씨도 쓸쓸한 것이, 하루 종일 라디오에서 가을과 어울리는 음악들이 흘러나왔죠. 그래서 윤서를 데리고 고속터미널 꽃시장에 나들이를 갔어요. 가을맞이 꽃꽂이를 하면 딱 좋을 날씨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요즘 고속터미널 꽃시장에는 정말 아름다운 가을꽃들이 많이 나와있어요. 특히 가을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노랑, 주황, 빨강 꽃들 뿐만 아니라 열매, 나뭇가지도요. 꽃꽂이를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냥 빈 화병에 툭 하니 꽂아도 멋들어진 작품이 나올 법한 재료들이 가득했죠. 저는 집 문 앞에 걸 리스를 만들 샘으로 이것저것 가을꽃들과 나무들을 사 왔어요. 꽃시장에 가면 다 사고 싶어 지기 때문에 꼭 지갑에 현금을 비워두고 가야 돼요. 아니면 나중에 감당 못할 정도의 꽃을 집에 가져오게 되죠.


정말 놀라웠던 것은 윤서 앞에 제가 오아시스를 하나 주고 꽃을 다듬어 주니 윤서가 엄마 따라 하나하나 오아시스에 꽃꽂이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고슴도치 엄마 같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정말이랍니다. 아마도 윤서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인 생일 케이크에 초꼽기에서 배운 것 같은데요, 여기저기 돌려보며 집중력을 발휘해 꽃꽂이를 하는 모습이 정말 신기하고 귀여웠어요. 아기에겐 뭐든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뭐든지 혼자 다 해보게 하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천천히 자기 만의 속도로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요. 아이 교육에 대한 제 기본적인 생각이에요. 온몸에 생크림 범벅이 되더라도 혼자 케이크에 초 꼽는 것을 하게 내버려두니 이렇게 어느 날 멋진 꽃꽂이를 선보여 엄마를 감동시키다니요!



결국 제가 꽃 선택을 잘못하는 바람에 원래 하려고 했던 대문 리스 걸이는 만들지 못했지만, 대신 테이블에 놓아둘 센터피스 촛대를 완성했어요. 시카고에 가서도 이렇게 꽃 도매시장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전문가가 만들어준 멋진 작품을 사 오는 것도 좋겠지만, 온 부엌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아기와 같이 꽃꽂이를 하는 이 시간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더 자주, 더 오래, 앞으로 내 손으로 직접 노닥거리는 시간을 가져야겠어요. 결국은 그게 남는 추억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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