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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후 Sep 15. 2016

1. 너희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해라.

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어느 날 밤, 시끄러워서 잠에서 깼을 때, 속옷 차림으로 무릎 꿇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고 있었고 하얀 속살에 시퍼런 멍자국이 군데군데 퍼져 있었습니다. 누런 바닥 장판엔 어머니의 피가 다닥다닥 묻어 있었고, 어머니의 몸에도 말라붙은 핏자국이 누더기 천처럼 가득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버지 옆엔 당구 큐대가 있었고요. 어머니는 언제부터 맞은 걸까요?    


국민학교 2학년쯤의 기억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더 이상 세상모르고 잠들 수 있는 아기가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올 때까지 수많은 밤을 그렇게 깼습니다. 제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을 아기 시절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어머니는 언제부터 맞아 왔을까요?    


무섭기도 하고, 또 금세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냥 잠든 척하던 밤들이 있었습니다. ‘불쌍한 우리 엄마’ 하고 속으로 흐느끼면서 돌아누운 제 콧등을 지나 눈물이 옆으로 주르르 흘러 베갯잇을 적셨습니다. 그러나 그걸로 끝난 적은 없었지요. 울면서 일어난 저를 어머니는 부둥켜안고 우셨습니다. 비키지 않으면 둘 다 죽여버리겠다는 아버지의 협박에 저는 슬그머니 옆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저를 다시 끌어안으며 같이 맞아 죽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엉엉 울었습니다. 찌푸려진 입술 사이로 짠 눈물이 스며드는 동안 집안의 가구는 다 부서져 갔습니다. 모든 유리창이 깨지고 모든 유리그릇이 박살이 났습니다. 지금은 그 많은 일들이 어떻게 끝이 났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날이 밝아 오면서 방바닥을 청소하다가 시간이 되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학교에 갔습니다.    


일등은 아니었지만 학교 성적은 잘 나오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말없고 순종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울리지도 않는 자존심만 세졌습니다. 성적이 잘 나오는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당시 참고서의 양대 산맥이었던 동아전과나 표준전과가  없었습니다. 숙제를 베낄 수가 없어서 문제를 죄다 풀었는데 그 때문에 시험 성적이 잘 나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저는 학교에서 조용히 말 잘 듣고 성적도 잘 나오는, 선생님이 보시기에 뭐든 괜찮은 편인 아이가 되어 갔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같은 책상을 쓰는 짝과 짜고 서로의 시험지를 냥 올백으로 채점을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아무런 의심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재능이 많았던 그 짝은 공부도 잘했고, 그림도 잘 그렸고, 음악 시간에는 선생님을 대신해서 피아노 반주도 했습니다. 어릴 적에 보면, 공부나 예체능 할 것 없이 모두 잘하는 애들이 꼭 한두 명씩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그랬습니다. 그 아이는 나중에 켄지라는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저는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잘하는 편’인 평범한 학생으로 커갔습니다. 착한 거 빼고는 다른 것은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누나는 그냥 학교에 다니는 것도 버거웠나 봅니다. 가출이 잦았던 누나는 자주 그리고 많이 혼이 났고 어느 날 이후 아주 오랫동안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나는 어머니의 한이 되었습니다.    


파출부 일을 하셨던 어머니는 보통 9시 반쯤에 집에 오셨지만, 많이 늦으실 때는 제가 잠들 때까지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습니다. 저는 늘 혼자였고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먼저 숙제를 끝낸 다음 항상 TV만 주구장창 보았습니다. 그 와중에 어떤 아주머니가 집에 와서 부모님을 마냥 기다린 적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빚쟁이였습니다.     


그렇게 혼자였던 저에게 TV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광고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커피 광고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가슴의 반은 늘 열어놓는다.   

그리움의 반은 늘 닫아놓는다.   

…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아직도 만남보다 소중한 말을 알지 못한다.   

그리움보다 진한 말도 알지 못한다.   

…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던 그 커피 광고는 본능적으로 끌렸습니다. 그 말이 참 좋았습니다. 그 배경 음악도 그저 좋았습니다. 15초간 짧게 외국을 구경할 수 있었던 항공사 광고도 기억이 선명합니다. 프랑크푸르트에 취항을 한다는 광고였는데, 그땐 그곳이 어딘지, 얼마나 먼 곳인지, 누가 살고 있는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취미나 특기라는 게 없고, 뭐든 어중간한 편이었던 제가, 당시 애국가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TV나 보던 제가 어머니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요? 어머니께서 살아오신 세상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 아들의 앞길이 걱정되지 않으셨을까요? 어머니는 항상 착하게 살라고, 손해 보며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겪어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없으셨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희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가 전부였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면서 복권은 왜 사셨는지... 부부싸움이 크게 벌어져도, 사업을 하다가 돈을 뜯기고 집안이 폭삭 망해도, 집에 빚쟁이가 찾아와서 죽치고 앉아 있어도 “너희는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가 전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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