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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후 Aug 10. 2017

14. 전투력 제로의 부상병

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제 군생활 중에는 모든 것을 덮어버린 큰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허리 수술이었습니다. ‘쿵, 쿵, 쿵, 쿵’ 하고 다니는 전차가 몸에 부담을 주었는지, 제대 6개월을 남기고 저는 허리를 다쳤습니다. 전투 체육 후에 그냥 파스를 붙이면 좀 나아지리라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지요.   


새벽 3시쯤 통증이 저를 잠에서 깨웠습니다. 처음엔 허리에 압정이 눌려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못이 세로로 박힌 듯하더니 숨만 쉬는 움직임에도 근육을 찢는 것 같은 통증이 쫙 퍼졌습니다. 커다란 철근이, 날카롭게 양쪽이 절단된 철근이 허리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땀이 나는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사통은 허리에서 퍼지기 시작해서 무릎으로 길게 그림자처럼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정강이를 타고 발등 쪽으로 벌레처럼 기어 내려갔습니다. 그때 제가 재채기를 했는데, 어릴 적 만화에서 보던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장면이 몸에서 그대로 연출되었습니다. ‘꽝’ 하고 허리에서 폭발한 통증이 ‘지지직~’ 하고 신경을 타고 전기처럼 그러나 슬로 모션으로 허벅지를 지나 정강이로 내려가더니 발등을 지나 엄지발가락 끝에서 2차 폭발을 했습니다. 상어 이빨로 가득한 철근이 허리부터 발끝까지 제 몸에 들어와 마구 쑤셔대는 것 같았습니다. 고통 속의 저는 ‘어억, 어억-‘하면서 연신 신음소리를 토해냈고 눈물은 화생방 훈련하듯이 쏟아졌습니다.   


그렇게 3시간 정도를 버티다가 아침 6시경에 군의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힘겹게 부축을 받아서 2층 계단을 내려와서 군의관의 승용차까지 갔는데 차를 타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도대체 허리를 굽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바닥에 엎드려 누운 저는 포복하듯이 기어서 차에 올랐습니다.   


근처 병원에 가서 MRI를 찍어본 결과 ‘팽윤’이 아니라 ‘탈출’이라고 했습니다. 허리디스크 용어를 그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디스크가 튀어나온 걸 넘어서 터져서 흘러내렸다는 말이었습니다. MRI 사진에 척추의 젤리 같은 물렁뼈가 신경을 누르고 있는 것이 제 눈으로도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곧바로 일동 국군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통증을 참다 지쳐서 잠이 들고 그러다 다시 통증이 저를 잠에서 깨우는 지옥 같은 시간이 반복되었습니다. 통증을 참기 위해서 환자용 철제 침대를 부들부들 붙잡고 있는 저에게 간호 장교는 진통제가 떨어졌으니 며칠 더 참으라고 했습니다. 하반신 불구가 되더라도 좋으니 신경을 끊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솟구쳤습니다.  


디스크 발병 후 3개월 정도가 지나자 저는 다리를 절어가며, 아프지 않은 자세를 찾아가며, 조금 이상한 모습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몸이 크게 흔들리면 통증이 커졌기 때문에 재채기 기미가 보일 때마다 가까운 기둥이나 벽에 손을 대고 온몸에 최대한 힘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통증이 완화되었지만 결국 저는 수술을 결심했습니다. 통증이 줄어드는 것은 신경이 마비되어 가기 때문이라고 군의관은 말했습니다. 주말 외출 제도를 이용해서 저는 수술할 병원을 알아보았습니다.   


크게 아팠던 적이 없었던 저에게 병원은 또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유명한 선생님이 있는 대학병원에는 가족이나 지인들이 번갈아 가며 2~3일째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당일 접수 대신 예약을 하게 되면 일 년 후에 스케줄이 잡힌다고 했습니다. 원래 예약이 많은 데다가 중간중간에 인맥을 통해서 환자가 새치기로 끼어들면서 일 년 후에나 스케줄이 잡히는 것이었습니다.   


광고가 많은 병원들은 일처리가 빨랐는데, 사실 수술 일정을 잡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니까 장사하기 바빴습니다. 어떤 곳은 병원의 ‘간판’ 선생님이 다섯 개 정도 되는 방을 한 10초씩 들르면서 한 마디하고 나머지는 일반 선생님들이 상담을 마무리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특진비를 받더군요.   


수술을 하려면 수술 2~3일 전에 입원을 해야 하는데, 자리가 없으니 우선 1~2인실에 머물다가 6인실로 옮겨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는 병원도 있었습니다. 설명을 마친 담당자는 제 눈길을 피했습니다. 역시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사하는구나.’     

6인실로 바로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을 좀 더 찾아보라는 아내를 설득한 저는 결국 2인실에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고 그렇게 병원에서 누워만 있는 제가 아내를 지치게 했나 봅니다. 며칠간 저는 혼자서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습니다. 마침 일이 없으셨던 형님 - 아내의 오빠 – 께서 저를 돌봐 주셨습니다. 아내는 ‘왜 아파서 사람을 힘들게 하냐’ 라며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아프면, 개인도 가족도 힘이 듭니다.  


일주일 후에 퇴원한 저는 다시 군 병원으로 복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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