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모든 것이 그렇듯 처음엔 힘들었지만 저는 은행 업무에 차츰 적응을 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회사 일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인지 학교에서 배운 건 하나도 없더군요. 하기야 저는 문학을 전공했으니까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일 잘 한다는 말도 듣게 되고, 퇴근 후 집에서 이것저것 공부도 하면서 실무를 넘어 이론적 배경도 습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모니터 요원이 근무 상태를 점검하곤 했었는데, 운이 좋아서인지 이른바 친절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손님이 지점장님께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하더군요.
“전화 응대가 좋고 목소리도 좋아서 어떤 직원인지 궁금해서 한 번 와봤더니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제 표정은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화가 나 보인다거나 그늘져 보인다는 말을 늘 들어왔으니까요. 자라온 환경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어찌할 수 없으니 제 얼굴 표정 때문에 저 자신도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한 번은 놀이터에서 아기랑 노는 것을 캠코더로 촬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녹화된 화면을 보니 역시나 화면 속의 저는 인상을 쓰고 있더군요. 표정이 왜 그러냐며 아내에게 질책도 당했습니다. 저도 제 인상이 정말 싫었습니다. 제 증명사진을 다자이 오사무는 <인간 실격>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참으로 기묘하고 추잡하며 괜히 사람을 메스껍게 만드는 표정의 사진이었다.’
‘피의 무게나 생명의 쓴맛 같은 충실감은 조금도 없으며, 새처럼도 아닌 깃털 한 장처럼 가볍게 그저 백지 한 장만으로도 웃고 있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낸 것만 같았던 것이다. 부자연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저 불쾌하고 짜증만 나 그만 눈을 돌리고 싶어 진다.’
그렇다고 시골 동네 은행 직원이 친절하길 포기해서는 안되지요. 한 달에 한 번, 건너 방의 할아버지는 저에게 통장과 도장을 맡기시면서 돈을 찾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몇 만 원 정도의 노인 연금이었는데 할아버지가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라서 처음에 흔쾌히 부탁을 들어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도장이 통장에 찍힌 도장과 다른 것이었습니다.
비슷한 경우가 지점에 내방하는 고객한테도 있었습니다. 시골 은행에는 자기 이름을 직접 쓰시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이른바 ‘자필’ 서명이 불가한 것이지요. 제가 대신 써드리면 안 되기 때문에 돈을 찾을 때마다 고민을 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출금 전표를 써드렸습니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쇠약한 몸이 느껴졌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꽉 껴안으면 으스러질 것 같았습니다.
남 모르게 저 혼자 맘이 아픈 일도 있었습니다. 연체 독촉을 하러 채무자의 집으로 전화를 걸면 십중팔구 어린아이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부모님 안 계시니?’라고 물으면 안 계신다고, 잘 모르겠다는 어린 목소리가 전화로 전달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전화기 저 반대편에는 어린 시절의 제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은행 단말기에 아버지의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해 보곤 했습니다. 화면이 빨갛게 변하면서 ‘신용불량자’라는 경고 메시지가 깜빡 꺼렸습니다. 인생을 왜 그렇게 사는지..., 그땐 그 어린아이의 아버지도, 제 아버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 표정은 어땠을까요? 그렇게 구겨진 인상으로 억지 웃음을 지으며 저는 친절하게 다음 고객의 업무를 처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