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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후 Sep 15. 2016

5. 친구의 풋사랑, 나의 외사랑

중산층 진입 실패의 르포르타주 - 취준생 바보 아빠


야한 잡지책. 기숙 창고에서 생활하던 우리에게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순진했고 이성 문제엔 철저히 숙맥이었습니다. 그나마 진묵이가 한 여학생과 풋사랑을 나누고 있었는데, 그가 그 설렘을 친구들에게 얘기해 주는 걸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사주면서 기숙 창고 문 앞에서 쭈그려 앉아 듣곤 했습니다. 진묵이의 연애가 허언이 아닌지 알아보려고, 그 풋사랑을 구경이나 한 번 해 보려고, 고등학교 친구들은 밤 10시 야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그 여학생을 몰래 보러 가곤 했습니다. 


중고등 학교들이 한 동네에 몰려 있어서 밤 10시가 되면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은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여학생을 보는 경우도 허탕을 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저 그 흐름에 휩쓸리는 것, 그것이 그저 즐거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진묵이는 대입 시험을 망쳤습니다. 시험 전날 밤에 생애 처음으로 키스를 했는데, 그 때문에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했습니다.

    

저에게도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습니다. 교복이랑 명찰 때문에 어느 학교에 다니는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지만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도 그녀를 보았다’라고 시작하는 일기를 적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아이와 저는 등굣길 버스 정류장이 같았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곳에는 육교가 있었고 한쪽에는 서점이, 그 맞은편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습니다. 근처에는 꽃집도 있었지요. 언제부터인지 저는 등굣길에 일찍 나와서 버스 1~2대 정도는 그냥 보내면서 그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타는 버스를 따라서 탔습니다. 그 아이가 일반버스가 아닌, 값이 두 배 이상 비싼 좌석 버스를 탈 때에도 무조건 따라 탔습니다. 좌석 버스는 고속버스처럼 의자가 한 줄에 4개씩 있었는데, 뒤에 누가 앉았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자리가 비어있으면 일부러 그 여학생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렇게 뒷자리에 앉아서 유리창에 비친 그 여학생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져보곤 했습니다.    


투명한 차창에 비친 맑은 소녀는 당시 유행했던 서정윤의 <홀로서기>나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쓰인 편지지나 책갈피에 삽화로 등장하던 오오타 케이분이 그린 소녀와 많이 닮았었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보기가 힘들어졌지만 일요일을 집에서 보내고 등교하는 월요일 아침이면 언제나 그 여학생을 기다렸습니다. 그 여학생의 이름은 유명한 가수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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