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애플이 아이폰을 들고 나오면서 스티브잡스를 따라한 한 때의 해프닝이긴 했지만, 이것이 창의성과 혁신에 대한 기업 리더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일이다.
우리 구세대의 리더들은 생존하기 위해 먹고살만한 나라의 기업에서는 쳐다보지도 않을 일들을 목숨 걸고 시도를 하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부족한 자원의 한국이 지금까지 해온 생존 창조이다.
물론, 한국은 뛰어난 아이디어와 손재주를 가진 사람이 아주 많다. 그러다 보니 웬만한 손재주로는 몸값을 높이 받기도 힘들다. 독일에 살았으면 '마이스터'라고 불리며, 일주일, 한 달에 물건 하나 만들고도 편하게 먹고살 사람들이 천지에 깔려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사람이 많다 보니 경쟁이 너무 심하고 몸값도 제대로 못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런 인재들을 언제든지 모집할 수 있는 한국 기업들은 왜 세계적인 혁신서비스를 만들어 내지 못하나? 보통 우린 이것을 창의적이지 않거나 도전적이지 않아서라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겨우 생존하기 위한 혁신만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결핍 창의성이라는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창의적 사고란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고, 이제 먹고살만한 우리에게 필요한 창의적 사고는 어떤 것인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실행하던 '창의'는 목표지향적 창의 사고이다. 다른 말로 '구조화 사고'를 통해 구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인데, 주로 제품 프로세스 개선, 효율성 제고,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한 사고 체계다. 간혹 발상의 전환이라는 방식을 사용하지만 그것도 역시 전환 방식이라는 구조아래에 정리될 수 있다. 그리고 감히 '발상을 전환하는 게 허용되는 사람'은 주로 기업 사장이나 사내에서 힘 있는 임원 정도는 되어야 되었다. 그 아래 누구도 감히 그런 행동을 하겠는가? 부장이나 과장 누구도 감히 결과가 확실하지도 않은 발상의 전환을 하겠는가?
지금은 사라진 'L'사의 휴대폰 사업부 얘기를 해보겠다. 'S' 사의 동일 사업부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의 허락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물론 기술적 제한으로 막히는 경우는 있지만 디자인 안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과 자원의 우선순위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L'사에서는 어떤 아이디어를 휴대폰에 적용하기 위해 콘셉트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제일 먼저 돌아온 피드백이 '다른 회사에서 구현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게 효과 있는지 알죠?'였다.
'L'사의 다른 사업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휴대폰 사업부가 문을 닫은 이유는 이 건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장이나 상품기획팀장 정도가 그 아이디어를 냈다면 그 구현 검토까지는 가지는 않았을까? 단, 그것이 수익을 낸다는 전제하에.
일반 기술기업들은 잘 모르던 두 번째의 '창의'는 비구조화된 사고가 필요한 '탐색적 창의 사고'이다. 이는 어떤 명확한 목표 없이 발산적으로 사고하고 실험하고 실패하면서 의도치 않았던 것을 발견해 나가는 방식의 창의이다. 있다면 방향성 정도일 것이다. 이런 방식은 디자인 업계라고 할 수 있는 광고나 스타일링 디자인과 같이 명확한 목표 없이 현재에서 출발하여 앞으로 나가면서 무엇이 있는지 발견해 나가는 방식인데, 주로 MBA 트레이닝을 받은 비즈니스 리더들에게는 매우 불안하고 의심스러운 것으로 대부분의 기업에서 디자인 리더들을 사장 자리에까지 앉게 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에 화학기업의 경우는 다루는 재료의 특성상 명확한 목표 지점이 없이 뭔가가 만들어지는 것을 허용하는 문화가 있다. 3M이 만든 '포스트잇'이 대표적 상품이기도 하다. 시작은 목표가 있었지만 결과는 그 방향안에서 목표를 벗어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L'사의 생활화학부문은 다소 그런 실험과 발견의 문화가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 거기서 일해 보지 않았으니 단지 짐작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일반인들이 가장 접하기 쉬웠고 배운다면 이해하기도 쉬운 목표지향적 창의성과 디자이너, 예술과 혁신가들에게 필요한 탐색적 창의성이 두 가지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다.
스티브잡스는 이런 두 가지 창의성을 모두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스티브잡스도 구조적 창의성에 더 가까운 활동을 한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인간 감각과 감성에 대한 통찰력과 그것을 사업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구조적 사고가 사업가로서의 도전적 성향과 잘 맞아떨어져 마치 비구적 사고로 창의력을 발휘해 혁신을 이룬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스티브잡스 머릿속에 비구조적 사고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비구조적 사고를 하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활용하여 결과를 내는 사람이 적을 뿐이다.
서양인이 대부분인 회사에서 일하면서 발견한 것이 있다. 이들의 사고가 상당히 비 구조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은 발표자료를 만들 때 구조가 명확해서 각 페이지가 챕터인지, 서브챕터인지, 예시인지 등 전체가 어떤 높이에 속하는지 표시를 한다. 그런데, 서양직원들은 발표자료를 만들 때 어떤 페이지의 내용이 전체 목록의 어떤 높이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게 작성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나의 경우는 그런 발표자료를 보면 전체내용의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무엇인가 보게 되면 단점이 있다. 전체구조를 머릿속에 그리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무엇인가 더 하려고 하면 그 구조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생각하게 된다. 그게 바로 'Think inside the box'이다. 한국의 우리 조상들은 이런 Think inside the box를 많이 했고 머릿속에 세상의 -음양오행 같은- 우주 전체의 원리를 이미 가지고 세상을 봤기 때문에 아마도 반도를 벗어나서 신대륙을 발견하거나 분자를 쪼개어 양자를 발견해서 세상을 이해해 나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인들은 'Think outside the box'를 했다. 머릿속게 전체구조를 먼저 그리지 않는다. 현재 있는 곳에서 시작하여 발견하고 경험해 나가면서 세상을 이해해 나갔다. 그들에게는 원리 보다 논리가, 관계 보다 개념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험하고 발견하고 쪼개야 세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구조적 사고보다 구조적인 창의성이 쉽고 편하다. 적어도 한국인에게는.
아이들을 창의력을 키울 수 있도록 키운다고 할 때, 다양한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한국의 방식은 대부분 구조적인 방식이다. 균형이 필요하지만, 별도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구조적 창의로 갈 것이다. 왜냐하면 신생아 때부터 우리는 아이들을 그렇게 키워왔다.
집안의 모든 방에는 문지방이 있다. 현관에는 신발 벗어놓는 턱이 있다. 아파트에는 아파트 경계선이 있어 이웃주민이 함부로 못 들어오게도 한다. 음식을 차리면 한상 위에 밥과 반찬이 구조적으로 이미 배치되어 있다. 어른, 선배, 동기, 후배와 같은 구조가 어딜 가든 있고 거기에 따르도록 교육받았다. 또한 여름의 실내는 시원하고 겨울 버스정류장은 심지어 따듯하기까지 하듯 모든 것의 문제가 이미 해결되어 있어 그런 구조안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구조나 문화를 갑자기 바꾸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개미사회를 창의적으로 만들기 위해 여왕개미를 일개미와 같은 등급으로 낮출 필요는 없는 것처럼, 그게 그냥 우리의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자원이 풍부해지고 이미 편안해진 사회에 적응하게 되면 목표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던 그 구조적 사고마저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해결할 문제가 없으니.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구조적, 탐색적, 실험적 사고이다. 이것은 자원이 있어야 가능하고 생존(상벌)과 상관이 없어야 가능하다. 아이들이 사회체계 속에 들어오기 전에 이런 사고를 연습해야 한다. 그 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일찍 시작하고 최대한 늦게까지 그런 경험을 몸에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비구조적 창의성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봤다.
금방 태어나서 한, 두 살 때 구조적 사고를 굳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사는 가정과 사회가 이미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울 수밖에 없다. 일단 유치원을 시작으로 교육체계에 들어가면 거의 구조화 사고 교육을 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별도로 구조화 교육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비구조적 사고를 90% 구조적 사고를 10%로 하게 한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50% 대 50% 로 구조적 사고를 늘린다. 왜냐하면 그래도 대학은 가야 하니.
고등학교 대입 때까지는 구조적 사고를 70%로 늘린다.
대학교에 간 아이들을 부모가 컨트롤할 수는 없지만, 성인이니 의지가 있다면 스스로 비구조적 사고를 10% 정도 까지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 되면 일부 직업을 제외하고 비구조적 사고가 사실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그래도 인생을 풍부하게 살려면 10% 정도는 비구조적 사고를 하려고 노력하는 게 어떨까?
'사고'라고 표현은 했지만, 사실 어떤 의도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뇌는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를 흡수하면 그러면 의도적이던 아니던 자연스럽게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이 일어나면서 사고와 합쳐진다. 다시 말하면 '감각'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부터가 중요하다.
새로운 것은 늘 '돌연변이'에서 나타난다. 진화란 유전자의 잘 정의된 유전자 전달 체계의 산물이 아니라 돌연변이를 통해 계속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한 놈이 살아남는 과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조상, 선배, 학교, 교과서에서 물려받은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지식에 의지해서만은 되지 않는다.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돌연변이'는 그런 기존에 잘 정렬되고 증명되고 확실한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뮤턴트를 만들려면 비구조적 사고가 더 유리하다.
우리 인간이라는 종족에게는 자연스럽게 이런 돌연변이 사고를 하는 개체들이 일정 부분 생겨나게 프로그래밍된 유전자가 있다. 그런 유전자를 잘 활용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이런 비구조적 사고를 하는 것도 좋은 현상은 아닐 것이지만,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에게서 비구조적 사고의 기회를 뺏어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에게 제공해줘야 할 환경이 있다.
구조나 체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편한 것이다.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해줘야 할 것은 불편한 환경을 주는 것이다. 그런 환경을 주는 것은 아이들이 어릴 때만 가능하다. 아이들이 커가면 스스로 편한 것을 찾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표준화된 것을 멀리하게 해라.
표준화의 대표는 스마트폰이다. 우리는 애플과 안드로이드가 만든 가상의 환경 속에 갇혀있다. 두 방식이 다르다고 하지만 사실 기기와의 상호작용 레벨에서는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고 있고 그 상호작용이란 것도 실제 환경에서 물리적인 것을 다루거나 사람과 대화하는 방식의 극히 일부분을 가져와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스마트폰은 현실세계에서 아이들이 하던 모든 것들을 삼켰다.
이제는 아이들이 문을 여는 방식을 실제 문 잠금장치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휴대폰에서 먼저 배운다. 실제 밀어서 열고 잠그는 걸쇠 잠금장치를 사용해 보면 알겠지만 불편하고 그리 쉽지 않다. 쉽지 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미세한 감각을 사용해서 잠금장치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뇌의 일부분을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아이폰의 밀어서 잠금해제는 표준화된 손가락 움직임을 요구하며 겨우 파충류들이 쓰는 정도의 뇌도 사용하지 않게 하고 있다. 아이들은 바나나 맛을 바나나에서 배우지 않고 표준화된 바나나맛 우유에서 배운다. 우리의 감각세포는 점점 단순화되면서 후퇴하고 있다.
현실세계를 다루게 하라.
한국인들의 손기술이 좋은 이유는 젓가락 때문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전 세계의 숟가락 중에 한국 밥숟가락처럼 국물을 정교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하는 숟가락도 없다. 젓가락도 아시아의 다른 나라 젓가락보다 얇으면서도 강하다. 복잡하고 섬세한 움직임과 더불어 조절해야 하는 힘의 폭도 상당히 넓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그런 경험을 더 할 수 있게 현실을 다루게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아기 때부터 포크를 손에 쥐어준 적이 없다.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을 다루게 하고, 아이패드에 그림을 그릴게 아니라 구겨질 위험이 있는 종이를 사용하여 깔끔하게 한 번에 그릴 수 없는 수채화를 그리게 해야 한다. 조립도까지 제공되는 레고 대신 일정한 형태가 없는 재료를 만지게 해야 한다. 원하는 형태와 움직임을 상상해야 가지고 놀 수 있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놀게 해야 한다.
사람의 뇌는 매우 뛰어나서 부족한 정보를 상상으로 채운다. 상상에 필요한 정보는 추상화되어 저장된 기억에서 오는데, 이렇게 완벽한 모양과 기능의 장난감이 아닌, 일정한 형태도 없고 정확히 원하는 모양을 구할 수 도 없는 그냥 나무 막대기 장난감이 오히려 상상의 힘을 키워준다.
1933년 오리지널 '킹콩'영화를 본 적이 있나? 지금 보면 스톱모션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같은 고릴라지만 그것을 처음 본사람들은 매우 놀라워했다. 실제 거대한 킹콩을 보는 것으로 착각하고 흥분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것이 우리가 비의도적으로도 사용하게 되는 상상력의 힘이다.
우리에게 이제 그런 상상력이 없다. 정교한 컴퓨터그래픽으로 어떤 사실적이고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컴퓨터그래픽으로 된 영화를 본 다고 내 상상력이 증가하는 게 아니다. 누가 전해준 이미지로 자신의 상상력이 증가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상상력의 결과물을 본 것뿐이다. 내가 멋진 자동차를 알아보고 흥분한다고 해서 그런 멋진 자동차를 상상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문제를 해결하도록 동기부여하라.
지루함은 아이들이 참기 힘들어하는 기분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와 위험한 것 안전한 것을 지속적으로 발견하려고 한다. 그래서 주변의 새로운 정보를 지속적으로 감지해야 덜 불안하다. 아이들은 마치 원시인이 -현대인도 그렇지만- 생존을 위해 단맛을 찾듯 생존을 위해 주변의 정보를 섭취해서 머릿속에서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 가면서 순간적인 정보를 기존에 쌓아놓은 정보와 결합하여 효과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경험, 통찰력, 지혜 등으로 부른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은 자극이 없는 지루한 상황에서 마치 단맛을 찾듯 자극을 스스로 찾게 된다. 그것이 이들이 가지는 첫 번째의 문제해결이다. 그 한 방법이 상상력으로 그 빈틈을 채우는 것이고, 놀이자원을 스스로 찾아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아이들을 지속적인 자극에 놓아준다고 그 정보를 다 흡수하는 것도 아니며 요즘 시대의 다양한 자극이란 대부분은 표준화된 자극이기 때문에 정보량의 차원에서는 차이가 없다. 최신 디스플레이와 소프트웨어로 재현하는 색상일지라도 사람이 감지할 수 있는 색상의 50%밖에 되지 않는다. 감각의 섬세함이나 스펙트럼으로 정보를 늘리는 게 아니라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될 뿐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그림물감을 사주고 싶으면 절대로 24색을 사주지 마라. 그러면 아이들은 그림을 그 24색으로만 그리게 된다. 문제 해결 방법치고는 매우 간단한 방법이다. 물론 편하다. 원하는 색상이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를 이미 누군가 해결해서 손에 쥐어 주었으니. 차라리 12색이나 8색 정도를 손에 쥐어줘라. 심지어 3가지 색도 좋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24색 이상의 색상을 스스로 만들어낼 것이다. 만일 여전히 주어진 색만 사용한다면 그 아이는 색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동기자체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자신을 표현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자동으로 해결되어 왔을 가능성이 높거나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 쪽으로 발달했을지도 모른다.
불편함은 발견과 발명의 원천이다. 불편한 현재 상황을 벗어나 좀 더 편한 상태로 가고 싶은 욕구는 주변을 살펴서 새로운 것을 찾게 만들고 새로운 것이 없다면 스스로 만들어내게 한다. 어린이들이 뭔가를 만들어 그것으로 사업을 할 것이 아니다. 만들어낸 것이 뭐가 되었건 그 결과물의 품질이나 성능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아이들이 세상을 탐험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상상하고 사고하고 가상의 세계를 머릿속에 만들어가는 과정에 필요한 재료일 뿐이다.
아이들은 가끔 소리도 없이 혼자 뭔가를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우리 부모들은 그럴 때면 생각한다. '아 또 뭔가 사고를 치고 있구나'. 하지만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집중하게 내버려 둬라. 그렇다고 아이들이 사회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사회성을 배우는 다른 많은 시간이 있다. 오히려 우리는 집중의 시간을 내버려 두지 못하는 습성이 있다. 그것도 우리 어른들이 상호 작용의 자극의 환경에 익숙하다 보니 아이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이들을 어른 자신의 자극제로 사용하려는 행동이다.
깊이 들어가게 해라
우리의 사고는 영화 인셉션과 같이 여러 층이 물고 물려있다. 인공지능이 딥러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면 사람은 딥싱킹으로 생각의 깊이를 더해 간다.
첫 단계에서는 표면의 문제, 눈에 보이는 영역에 대해 인지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눈에 보이는 이면이나 그것들의 관계에 대해 탐색을 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3자의 입장에서 탐색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입체적으로 평가한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앞서 탐구한 영역에 시간적 차원을 더 하던가, 다른 환경과 역할을 부여하는 등 일반적으로 창의적 사고의 단계에 들어간다. 그게 좀 더 구조적으로 진행된다면 예측이나 전략, 트렌드 분석과 같은 행동으로 보인다.
이렇게 깊이 있는 사고의 단계에 들어가려면 자연스럽게 주변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지 사고 자원은 한계가 있고 특히 어린이에게는 더욱 그렇다. 가끔 우리는 아이들의 시야가 좁다고 그것을 부정적인 관점에서 얘기하고 부주의하다고 나무라기도 한다. 그것은 어른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닌 어떤 것에 그 아이는 인지자원을 모두 할당하여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다. 운전을 하면 속도가 빠를수록 시야가 좁아진다. 첫째, 운전자에게 속도가 높을수록 운전자의 옆쪽보다 상대적으로 앞쪽에서 문제가 될 일이 훨씬 많이 나타나고 앞쪽에서 빠르게 나타나는 정보가 작업기억영역에 저장될 시간이 부족하고 주변에 있는 것보다 앞쪽에서 오는 정보를 더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 시각정보처리자원을 앞쪽에 할당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빠를수록 우리의 시야가 좁아지는 물리적 현상 때문이지만, 자동차를 빛의 속도에 50% 까지 몰고 가면 우리의 시야는 60%로 줄어든다고 한다. 집중에 의해 시야가 좁아지는 이런 상황은 첫 번째의 경우에 비유해서 얘기하는 게 더 맞겠다.
아이들이 주변 감각을 차단하고 뭔가에 집중하는 것은 자신의 인지자원을 뭔가에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것도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다. 반면에 어른들은 이미 그런 세상의 물리적 정보를 이미 머릿속에 가상으로 축적해 놓았고 매우 좁은 현장 정보만 있어도 그 가상의 정보와 합쳐서 금세 주변의 물리적 상황까지 다 파악해 버린다. 그래서 어른들은 물리적 상황 판단이 아닌 문제해결, 사회성 같은 정보사용의 목적이 관심사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아이들이 정작 필요로 하는 정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뭔가 작은 물건, 움직임, 감촉, 맛, 빛이 만들어내는 정보 또한 새로운 정보이며 축적해야 할 것들이다. 그 순간에는 아이들이 자신이 가진 인지자원을 거기에 모두 할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그다음 단계들로 들어갈 수 있다. 그다음 단계를 우리는 '몰입'이라고 부른다.
다양성을 제공하라
다양성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어떤 새로운 것이 여전히 새롭게 보여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 비슷한 것 여러 가지를 보여준다면 금세 패턴을 파악해 버린 아이들은 금방 거기서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규칙, 재료, 상호작용이 다른 것을 접하게 해주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표준화된 것들의 다양성은 다양한 것이 아니다. 표준화된 것들은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그 한계가 쉽게 패턴인식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몇 개만 경험해 보고 나면 나머지들을 모두 탐색해보고 싶은 동기를 일으키지 않는다.
시간을 들여야 깊이 들어가는데, 그렇게 시간을 들이게 하는 요소의 하나가 다양성이다. 관심을 오랫동안 끌 수 있는 요소가 있어야 시간을 들이고 그래서 사고의 다음 차원으로 넘어갈 시간을 확보한다. 동일한 수준의 다양성이란 사실 방향성이 없기 때문에 쉽게 몰입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도파민을 활용하게 되는데, 복잡해지고 난이도가 높아지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서 긍정적 도파민 사이클을 형성하도록 해야 한다. 제발 전자기기의 부정적 도파민 사이클을 만들지 말기 바란다.
최고의 다양성은 자연에 있다. 자연 속에 들어가게 하고, 자연물을 재료로 사용하게 하고, 끝도 없이 다양한 촉감, 소리, 무게, 형태, 색상, 질감, 움직임, 변화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미 편안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자극적인 다양함에 익숙해진 아이들을 아무리 자연 속에 데려다 놓는다고 그것을 느낄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스마트기기가 제공하는 단순하고 자극적인 감각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자연의 그 다양함을 받아들일 능력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능력은 있지만 그것을 느낄 만큼 진득하게 기다릴 능력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심지어 어른들도 그런 능력을 잃어가고 있으니.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여행이야 말로 다양성을 접할 수 있는 기회다. 꼭 외국이 아니라도, 환경을 바꾸는 것이 이이 적응한 단계를 넘어 새로운 단계에 적응하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풀기 위해 집중하게 하는 한 방법이다. 게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배경이 바뀌는 것처럼.
실험하게 해 줘라.
다양성은 실험을 통해 얻어지기도 한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방법을 실험한다. 재료가 다양하면 재료의 어떤 조합이 더 좋은 결과를 내는지 이미 현재의 환경에서의 상호작용법 위에서 실험해 본다. 특히 조합은 무궁무진한 조합이 가능할수록 아이 스스로 조합의 난이도를 올려가기 때문에 집중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다.
많은 수의 조합이 가능한 교재들은 꽤 있는 것 같다. 맥포머스란 자석 장난감, 레고, 지점토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스스로 실험하게 하는 교재들은 시중에 꽤 많은데, 아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다양성을 창의적인 활동에 잘 활용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놀잇감들은 이미 매뉴얼로 정리되어 이렇게 해보라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목표가 있는 구조적 사고이다.) 사실 그래야 장난감을 구매할 능력은 있지만 실제 그 장난감을 손에 들고 실험해 볼 시간이 없는 부모들에게 쉽게 그 목적을 한 순간에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디자이너의 프로세스를 믿지 못하는 사장과 같다.) 아이들은 레고를 매뉴얼 대로 조립하고 모셔놓는다.
이것은 레고의 원래 의도가 아니다. 이미 조립된 장난감도 상상력을 통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돕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돕는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정해진 틀 안에서 표준화된 인터페이스로 구조적 창의를 추구하는 장난감에 가깝다.
모래나 지점토는 레고에 비해 탐색적 창의를 추구하는 놀잇감에 가깝다. 찰흙, 지점토, 모래, 나무토막 등은 아이들에게 많은 문제를 안겨주면서 특정한 목표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지점토를 오랫동안 가지고 실험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
다른 더 쉽게 표준화된 놀잇감이나 자극적인 디지털 재료들이 동시에 제공되는 한 아이들은 지점토나 모래를 가지고 실험하지 않는다. 왜냐? 사람의 인지회로는 항상 쉽고, 편한 쪽으로 (에너지를 적게 쓰는 쪽으로) 행동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레고의 조립도에 따라 자동차를 만들고, BMW 실제 모양과 똑같은 전동 자동차를 몰고 다니던 아이들이 불편하고 목표도 없는 장난감을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집중은 몰입하게 하는 입구인데, 기본적으로 몰입까지 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재료의 다양성과 스펙트럼, 그것으로 점진적으로 어려운 실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주게 되면 거기에 더 시간을 쓰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위에 다른 더 쉽고 편한 놀이들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특히 어릴수록 아이들은 제한도 주어진 환경으로 인식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 불편하고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리는 - 차선책을 자연스레 선택하기 때문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우리 선배들의 창의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구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 경계가 있고 이노베이션이 아닌 리노베이션에 가까웠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빨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초점이 있었다. 전쟁 후 빠른 경제 재건을 위해, 상명 하복의 체제하에 자원이 부족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실패하면 생존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수동적 창의였다.
이제 아이들은 자원이 풍부하다. 시간도 풍부하다. 마지막 하나 더 필요한 것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느끼는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을 보호해주고 있고 자신의 실험 결과가 비난을 초래하지는 않는 것을 알면, 자연스럽게 탐험하고 실험하고 사고를 확장한다.
어린이 보호
아이들은 시야가 좁다. 하지만 보호를 받고 있는지는 느낄 수 있다. 부모가 주위에 있는 것 만으로 아이들은 편안하게 놀이에 집중할 수 있다. 아이들은 놀이에 집중하다 보면 부모가 어딜 나가도 발견 못 할 수도 있긴 하지만, 부모가 옆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불안을 느끼고 놀이에 집중할 수 없다.
아이들이 놀다가 다칠 수 도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날지는 부모가 옆에서 지켜봐 주던가 사전에 위험한 요소들만 제거해 주면 된다. 아이가 놀고 있는 중에 끼어들어 그런 것을 하다 보면 아이들은 집중할 수 없고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제약사항을 주어야 할 때는 그 경계선을 명확히 해야 한다. 아이들은 빨리 배운다. 어디에 경계선이 있다고 배우는 순간 잊어버리지 않는 한 거기는 침범하지 않는다. - 물론 그게 진짜 경계인지 실험하는 경우도 많다. - 다시 말하면, 부모 스스로 명확한 이유를 가지고 그 경계선만 지켜준다면 아이들은 그 안에서 만큼은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실험할 것이다. 그 명확한 이유는 예를 들어 영구적 흔적이 남는 화상이나, 골절등 장기치료를 요하는 낙상 같은 구체적인 종류의 위험이나 공공장소에서 타인에 불편을 초래하는 행동 같은 것이다. 이 정도는 제한구역을 두더라도 아이들에게 충분한 실험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틀려도 돼
아이들의 실험은 직업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올바른 방식이란 게 있을 수 없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구름을 초록색으로 그렸을 때 제발 아이들에게 '구름은 흰색이야'라고 하지 말자.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우리가 '흰색'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한 구름의 다양한 색에 대해 동일한 심상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림은 그들의 실험일 뿐 어떤 것을 실재형상과 가능한 동일하게 그려야 한다는 도덕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초록색 구름을 보고 '그래 틀려도 돼, 아무렇게나 그리렴'이라고도 할 필요도 없다. 그 말자체가 초록색은 틀린 것이라고 강요하는 것이므로.
아이들은 어떤 물건들을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그걸 굳이 고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 가르쳐 줄 필요 없다. 스스로 알아낼 것이다. 생각보다 아이들을 영리하고 빨리 배운다. 급할 것 없으니 스스로 배우게 내버려 두면, 내가 가르쳐주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배운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터득하는 게 더 중요하다. 굳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문제해결에 필요한 다양한 관점을 넌지시 알려 줄 수 있는 질문만 그냥 더 져라.
'왜'라고 묻는 방법은 좋은 것인지 사실 잘 모르겠다. '왜'라고 묻는 순간 실험자체를 인정하기보다 옳고 그름의 판단으로 대화가 유도되기 쉬워지기 때문 일 것이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보통 문제 해결이나 도덕적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필요한데, 우리는 어린아이의 창의성을 키우기 위한 것이 목적이므로 그런 판단은 천천히 점진적으로 유도해도 되겠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집중하고 몰입하고 실험하고 상상하는 과정을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습관을 키워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보호해 주고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인정' 하는 방법의 하나로는 어른관점에서의 실패를 아이가 하더라도 나무라거나 고쳐주지 않는 것이 있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아이가 하는 과정에서 사고의 핵심이 아닌 부분에서 작은 도움을 주는 것이다.
뻔한 마지막 터치만 도와줘라
예를 들어 아이들이 초록색 구름이 있는 그림을 완성했다고 하자. 그 그림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런 방식을 장려- 칭찬의 다른 방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의도적으로 '참 잘 그렸어!' 같은 평가가 아니다. 그냥 그림을 액자에 넣어서 얼마동안 노력에 대한 보상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꼭 액자가 아니라도 된다. 그림을 어딘가에 놓고 얘기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절대 평가는 하지 말자.
아이가 로봇을 만들고 있는 데 부족한 부품이 생겼다고 하자. 내버려 두면 아이는 어쨌든 부족한 자원을 활용해서 로봇을 완성할 것이다. 그런데, 전기선이 떨어져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면, 이것 정도는 연결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택시를 타면 마지막에 기사가 가방을 트렁크에서 꺼내준다. 그게 별거 아니지만 사람들이 그 회사 택시를 한번 더 타거나 비용을 더 지불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한다. 부모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의 작은 도움은 아이들의 작업결과물이 더욱 덧보이게 만들고 아이들로 하여금 다음에도 같은 놀이에 노력과 시간이라는 비용을 더 투자하게끔 해 줄 것이다.
추가로 마지막 터치가 효과를 지속적으로 발휘하려면, 늘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랜덤 이어야 한다. 이런 작은 보상이 불규칙하게 주어졌을 때 행동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은 동물의 세계에도 통하는 자연적인 본능이다. 아이들이 보호받고 있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하는 환경이고 그런 작은 도움 또한 환경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창조를 위해서는 사고의 돌연변이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비구조적 사고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아이들에게 제공해야 할 환경을 얘기했다. 불편하고 몰입할 수 있고, 안전한 환경이 그것이다.
사고방식에 대한 아이들의 흡입력은 80%이고 성이 되면 20%로 줄어든다고 하자. 예전과 다르게 디지털화되고 표준화되어 가는 생활공간에 살고 있고 또한 더욱 편하고 부족한 자원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커서 비구조와 구조적 사고사이에 균형을 잡으려면, 구조적 사고를 덜 요구하는 유아-청소년 시절이 비구조적 사고를 훈련하는 최적의 시점이고 이후에 점진적으로 구조적 사고로 이전하는 게 두 가지 사고방식을 균형 있게 만들어나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기업의 조직에도 적용할 수 있다.
창의적인 성공은 대부분 복제가능한 상품과 서비스의 디자인경우가 많다. 여기서 디자인이라는 게 꼭 그림으로 그려서 표현하는 시각적 요소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 구조나, 시스템, 서비스의 구조를 설계하는 모든 것이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서비스의 경우 물리적 제약이 없어 상상의 결과를 빠른 시간에 사업화할 수 있으며, 복제가능하기 때문에 비구조적 창조활동에 들어가는 투자 대비 그 수확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창의적으로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한답시고 전 직원을 비구적사고를 하도록 할 수는 없다.
임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청바지를 입고 출근한다고 창의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창의성이 생명인 광고업계서 조차 구조적인 사고를 버릴 수 없고, 일반적인 상품을 개발해서 팔게 되는 경우는 구조적인 프로세스 없이는 효율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거나 정교한 설계를 할 수 없다.
따라서, 평균적인 기업에서 80에서 90%의 인력은 반드시 구조적인 사고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누군가 또는 일정시간은 그래서 10%의 인력은 바로 수익을 올리는 상품이나 서비스가 아닌 실험을 할 수 있게 내 버려두어야 한다. 그냥 1년에 몇 개월 TF로 하라는 게 아니다. 상시 10% 인력은 탐색하고 실험하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들에게 목표가 있다면 실패를 해야 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리고 그것이 보다 사업에 통합되려면 다른 10%의 인력이 미래 분석을 하고 전략을 세우게 하면 된다. 이 두 집단은 당장 수익을 내는 일을 하지 않는다. 현재 수익을 내고 있는 서비스가 아닌, 아직 알 수 없지만 가능성 있는 것들을 확산하고 실험해서 백가지 아이디어 중 단 하나가 그 20% 인력이 구조적 사고로 업무를 했을 때 얻었을 수익의 몇 배를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