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페이스댕 Jul 04. 2023

한 줌 상자로

그냥 사는 이야기

뉴질랜드의 주택가 지형에는 경사지가 많고, 그 경사지를 깎아 계단식 터를 만들고 집을 짓는다. 

그 계단식 경사지는 나무축대를 만들어 위쪽의 흙이 아래쪽으로 무너지는 것을 막는다.


우리 집 뒷마당은 이런 경사지로 되어 있고 얕은 나무 축대가 있고 그 위와 밑으로 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그 나무들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 주기도 하지만, 내려다 보이는 경사지 아래쪽 집의 사생활 보호 역할도 하고 있다. 높은 벽돌 담장보다는 훨씬 자연 친화적인 방법이다. 


또 다른 자연스러운 현상이 이들, 나무, 흙 사이에 또 존재한다. 위쪽에 심어진 나무들은 그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뿌리가 자라면서 공간을 차지하게 되고 앞쪽의 나무축대를 밖으로 밀치게 된다. 살아있는 나무와 죽어있는 나무의 힘 싸움이 일어난다.  

이들 간의 싸움은 4, 5년은 되었으리라 보이는데, 죽어있는 나무는 살아 있는 나무를 이길 수 없었나 보다. 나무축대가 밖으로 휘어져 아마도 2, 3년 안에 무너질 형상을 하고 있다. 돌로 쌓아올린 축대였다면 자라나는 뿌리의 등살을 견뎌내지 못하고 진작에 무너졌으리라. 뉴질랜드는 무슨 나무든 빨리자라니까.


자연 담장역할을 하며 2미터쯤 되는 폭을 차지하던 나무 두 그루...  나는 오늘 그 둘을 없애 버렸다. 

더 이상, 나무축대와의 싸움을 보고 있을 수 없어서였다. 나무축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바람막이나 사생활 보호보다 지반을 유지하는 축대가 살아남은 것이다. 죽은 나무인 축대가 살아남고, 살아있던 나무가 죽어야 했다. 


푸른 잎과 유려한 가지, 두 팔 가득 공간을 차지하던 그 두 그루의 나무를 연장으로 자르고 부수어보니 그냥 작은 이삿짐 종이 상자에 들어가는 크기였다.


살짝 슬펐다. 

살아있을 땐 세상의 공간을 차지하고 유용한 역할을 하던 이들.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요구하며 내 손을 탔던 이들이 겨우 한 줌이 되어 종이 상자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였다니... 있을 땐 몰랐지만 이들의 빈자리가 크다. 아마도 일 년이면 옆에 다른 친구 나무들이 그 자리를 절반은 메워 주지 않을까?


[2022년 여름의 얘기 중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