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동서양의 세상 바라보는 방식의 차이를 간단하지만 명쾌하게 설명하는 예시라고 생각한다.
2년 전 한국에 잠시 갔을 때 발견한 유사한 사건이 있는데, 이것도 실험을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 사진을 찍어와서 뉴질랜드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그 친구들은 한글을 모르니 영어로 바꾸어 실험을 했다.
서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중 처음 가 본 듯한 전철역 승강장에서 전철을 타려고 기다리다 아래 사진과 같이 안전차단문 위쪽 전광판에 기차가 들어온다는 표시가 떴다.
'<= 열차 당역 접근'
상황마다 다르긴 하지만 기차가 오른쪽에서부터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고 왼쪽에서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처음 간 기차역이라 예측 불가능한 상황.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위의 화살표를 보고 뭔가를 본능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나도 한국에서만 살았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밥 먹을 때 양손을 다 쓰고, 영국식 미국식 자동차 운전 방향을 모두 경험했다 보니 내가 어느 쪽에 익숙해져 있는지 헛갈릴 때가 많다. 그래서 순간 본능적으로 느끼는 방향이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건지 아니면 뉴질랜드 방식으로 느끼는 건지 잘 모를 때가 있는데,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의 생각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뉴질랜드 친구들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물론 몇 분후 기차가 들어왔으니 난 답을 알고 있다.) 뉴질랜드 직장 친구들은 다국적이다 보니 콜롬비아, 인도, 네덜란드, 영국, 남아공 등의 출신들이고 아시아보다는 서양인에 가까운 친구들이니 이들은 실제 기차가 들어오는 방향의 반대로 이해 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짐작이었다.
아래가 이 친구들에게 보여준 영어로 된 버전이다.
여기서 핵심은 저 빨간 화살표가 누구의 움직임을 표현하냐는 것이다. 그리고 저 화살표가 얼마동안 유효하냐이다.
일전에 내가 쓴 글에서 서양인들은 자신의 현재위치, 현재순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공간적 시간적 인식의 영역을 거기서부터 순차적으로 과거와 미래로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확장한다고 했는데, 여지없이 이들의 이런 관점은 여기서도 적용이 되었다.
이들 서양 친구들은 저 화살표를 현재 위치에서 자신들이 바라봐야 할 방향을 표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차는 자신의 왼편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차가 들어오고 나면 저 화살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물론 이 친구들도 내가 이것을 퀴즈로 낸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반대로 얘기해 보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기차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들어왔었다. 저 화살표는 기차의 입장에서 움직이는 방향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고 난 뒤에도, 떠난 뒤에도 저 화살표의 방향은 유효하다. 그런데, 이게 한국사람에게 직관적인지는 여전히 나에게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의 직관에 맞춰 디자인된 게 아니라 그냥 디자인되었는데 한국인들이 자주 보다 보니 익숙해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을 떠난 지 오래된 한국인 친구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물론 그 친구들은 지하철 안전문이 일반적이지 않을 때 한국에 살았었고 이런 특정 안내문구도 본 기억이 없거나 오래되었으니 좋은 실험 대상이었다.
친구들과 모임에서 휴대폰에서 원본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며 기차가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들어오고 있냐고 물었다. 결과는 반반 정도였다. 한국인의 멘털모델을 가진 사람이 조금 더 많은 수준. 뉴질랜드에 오래 살면서 여기에서 사용되는 표시에 익숙해졌으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분명 서양친구의 대부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고 했던것보다는 확실히 차이를 보이는 결과다.
여기서 내가 가지고 있던 일종의 선입견이 다시 한번 가설증명이 되었다.
한국 사람은 위의 전광판에서 두 가지의 정보를 얻고 있다.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과 이곳을 출발해서 나가는 방향 이 두 가지이다. 일단 플랫폼에 들어왔고 안전문이 설치되어 있다면 기차가 어디서 들어오는 건 그리 유용한 정보가 아니지만 그 기차가 여기서 끝나는지 출발해서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는 여행객에게는 유용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저 화살표는 미래의 정보일 것이고 아마도 운행을 끝내는 역에서는 저 화살표가 안 나올 것으로 예상이 된다. 한국 사람은 현재 순간뿐 아니라 이후의 일까지 미리 생각하고 있는데 이 전광판은 거기에 필요한 정보를 모두 표시해주고 있다.
서양인은 위의 전광판에서 이 순간에 필요한 정보만을 찾는다. 현재 기차가 어느 쪽에 있고 이 순간 뭘 하고 있는지. 그들에게 '기차는 운행이 되고 있고 지금은 왼쪽에 있다'는 정보가 중요한 것이다. 아마도 기차가 승강장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 화살표가 표시되고 있다면 서양인은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아무튼 이들에게는 이런 식의 정보가 더 쉬운 것이다. 다음에 일어날 일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끝나고 나서 생각해도 되니까. 이들에게는 세계가 순차적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는 듯하다.
런던 지하철을 타면 '북쪽으로 가는 빅토리아선입니다.'라는 식의 안내를 들을 수 있다. 물론 그 뒤에 다음역과 주요 경우역 그리고 종착역이 나오긴 하지만 승객을 중심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먼저 얘기한 후에 그 방향에 있는 역들을 말하는 것을 보면 앞의 가설이 더 맞는 듯하다. 이들에게는 현지점에서 취해야 할 행동이 우선이고 그래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다음이다.
한국 지하철에서도 상, 하행선 방향에 따라 기차진입 음악이 다르긴 하지만 이게 기차의 입장이지 플랫폼에 서있는 여행객의 입장은 아니다. 승강장에 서있는 승객의 입장에서 기차는 좌, 우로 움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 지하철 여행객은 상, 하행선의 개념이 아닌 기차의 종착역이 더 중요한 정보가 된다.
그리고 비슷한 개념으로 한국인에게는 도착시간과 환승이 빠른 자리와 같은 일종의 '미래준비'에 필요한 정보가 매우 유용하다. 반면 영국인들에게는 빠른 환승자리보다 지금 탈 때 편한 자리가 우선일 것이다.
'빨리빨리' 문화가 만연한 나라에서 자란 나에게는 미리준비하여 미래를 편하게 하고자 하는 생각이 모든 크고 작은 일에 적용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알 수 없는 미래에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이 크다. 내가 이 나라에서 불편한 것은 편의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하철이 없어서도 아니다. 생각의 결이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고 설득하고 할 때 내 생각의 방식까지 바꿔야 하는 게 제일 큰 불편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