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밥 먹는 데 자격이 필요할까
이 책은 저자의 실제 삶에서 비롯된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심리적 통찰을 바탕으로 구성된 에세이입니다.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사생활 보호를 위해 가명으로 처리되었으며, 실제 인물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글을 통해 과거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저자의 주관적 시각에 따른 해석이며, 법적 사실을 단정하거나 특정 인물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 책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비방하거나 공격하려는 목적이 아닌, 개인의 성장과 회복의 여정을 기록하고, 유사한 경험을 한 이들에게 위로와 통찰을 제공하기 위한 진솔한 성찰의 기록입니다.
이 기록이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루의 시간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매일 같은 아침, 점심, 저녁을 맞이하고 같은 일상을 보낸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각배 같다. 어디로 흘러갈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저물어 있다. 남편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걸 보면서 하루를 인지하곤 한다. 매일 다른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고, 매일 비슷하지만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남편의 이야기를 가득 듣는다. 남편 덕분에 세상과 닿아 있을 수 있어 조각 숨이 쉬어진다.
매일 같은 일상이지만 빠짐없이 챙기는 게 있다면 내가 먹는 식사다. 나는 집에 있어도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챙기는 편이다.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먹어야 할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나를 위해 간단한 요리를 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남편이 퇴근하면 남편이 원하는 요리를 쉽고, 간편하고, 빠르게 조리해 낸다. 남편이 내 요리를 좋아해 준 덕분에 나는 나날이 요리 실력이 늘어가고 있다.
남편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잘 먹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빠르고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음식 조리법들을 공부해서 그날 먹을 것만 만들어 먹게 한다. 그리고 매일 가능하면 남편이 원하는 음식을 물어서 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음식을 낸다. 그러면 집에 도착한 남편이 간단하게 씻은 후 바로 식사를 한다. 식사 준비를 위해 주마다 그 주에 먹을 음식 재료들을 구입한다. 3년 해 먹이다 보니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대부분 알게 됐고, 특별하지 않은 한 내가 구입한 식재료 안에서 모두 해결된다.
식재료 외에는 냉장고가 비어 있어 정리도 편하고, 음식 쓰레기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남편이 새롭게 먹고 싶은 음식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식재료를 구입할 때 미리 물어본다. 따로 말이 없으면 매주 구입하던 대로 필요할 거라고 생각하는 식재료를 구입한다. 덕분에 돈도 아끼고,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함께 식사하면서 대화할 시간도 많다.
그렇게 단순한 패턴 속에서 하루가 흘러갔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 퇴근하는 남편과 통화를 하며 오늘 저녁을 무엇으로 먹을지 물었는데, 하루가 몹시 힘들었는지 입맛이 없다고 했다. 그냥 굶겠다는 남편의 말 속에서 속상함이 묻어났다.
“오늘은 제대로 해 낸 게 없어서 밥 먹을 자격이 없어.”
밥 먹을 자격이 없다니. 밥 먹는데 자격이 필요하던가.
“그럼, 내가 먹고 싶은 걸 한다.”
“나는 안 먹을 거야.”
라는 남편의 말에도 나는 남편의 양까지 꿋꿋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 남편의 몫까지 밥을 차려놨다. 밥을 보자 입맛이 그제야 도는지 식탁에 앉은 남편이 그릇의 바닥까지 음식을 비워냈다.
“오빠, 밥 먹는데 자격이 어딨어. 그러면 나는 하는 게 없으니까 매일 굶어야겠네.”
“네가 뭐 하는 게 없어. 이것저것 많이 하잖아.”
“밥 먹는 건 그냥 먹는 거야. 살기 위해서. 인간은 먹어야 살 수 있잖아. 그러니까 먹는 데 자격 같은 건 필요 없어. 시험에 떨어져도 먹어야 하고, 돈을 못 벌어도 뭐든 간에 밥은 그냥 일단 먹는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자격 없다는 말 하지 마.”
밥 먹는데 자격이 필요하다는 말을 어디에서 들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 역시 어릴 때 누군가로부터 오늘 집안일을 제대로 거들지 못했으니 밥 먹을 자격이 없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내내 밥상머리 교육을 한답시고 하도 밥 먹는 걸 힘들게 하는 친척들이 많아 밥을 잘 먹지 않았다. 자격이 없다고 하든, 뭐라든 상관없이 원래 입이 짧았고, 먹더라도 그릇에 담긴 밥만 대충 긁어 입에 넣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데 저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내게 뭐 그렇게도 거슬린다고 젓가락질이며, 집어먹는 반찬까지 꾸중을 해대는 친척 어르신 덕분에 밥 먹는 걸 스스로 포기할 때가 많았다.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어보면서 어쩌면 남편도 누군가 밥을 먹을 때마다 자격 운운했던 건 아닌지라는 생각을 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밥 먹을 자격이 없다”는 말은 조건부 사랑(conditional love)의 내면화다. 무언가를 해내야만, 혹은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해야만 밥을 먹을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 어린 시절 밥상머리에서 듣던 꾸중은 결국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심어주는 훈련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신념은 무의식적으로 다시 살아난다.
하지만 밥은 그냥 밥이다. 인간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선 당연히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한다. 자의든 타의든 내가 해야 했던 일을 못했다고 해서 밥 먹을 자격이 없어진다면, 밥 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남편의 말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 밥상머리를 떠올리며, 동시에 나도 모르게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자격 같은 거 없어. 그냥 먹는 거야. 맛있는 거 먹으면 행복하고, 배부르면 기분 좋고, 건강하게 살 수 있잖아. 약과 식사의 근원이 같다는 말이 있으니까. 건강하고 행복하려고 먹는 거야. 그러니까 넌 살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히 먹을 자격이 있어. 그러니까 맛있게 먹어. 남편. 네가 먹는 걸 보면 내가 행복하니까. 나를 위해서라도 먹어.”
그 이후로 나는 남편이 먹을 때마다 남편 어깨를 두드리며,
“오구 오구 잘 먹네. 이렇게 예쁜 애가 어디서 나와서 이렇게 예쁘게 컸누. 많이 먹어.”
라며 매일 잘 먹는 남편을 칭찬한다. 먹을 자격이라는 건 없다. 그냥 먹는 거다. 매일 같은 일상을 보내면서 꾸준히 밥을 챙겨 먹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먹는 데 자격 같은 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자격을 따지다 보면 매일 굶어야 하는 건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내가 먹고 싶은 걸 나를 위해 만들어 먹기로 했다. 누구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먹을 자격을 허락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이 잘 먹을 수 있도록,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 조리법들을 즐겁게 공부해 간다.
오늘도 식탁을 차리면서 잘 먹을 남편 생각에 행복했다. 먹는 데 자격은 없다. 다만 살아 있는 우리가 서로를 살게 하기 위해 밥을 나누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서 나의 행복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살아낼 것이다.
1. Bowlby, John, Attachment and Loss, Vol.1: Attachment, Basic Books, 1969
→ 사용된 개념: 조건부 사랑(conditional love)의 내면화, 애착이론
2. Kohut, Heinz, The Analysis of the Self,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71
→ 사용된 개념: ‘있는 그대로의 나로는 부족하다’는 자기 인식, 자기심리학
3. Erikson, Erik H., Identity and the Life Cycle, International Universities Press, 1959
→ 사용된 개념: 수치심(shame)과 자격감(worthiness)의 발달, 발달심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