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살 뒤에 숨은 삶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김춘미 옮김

by 도바기

[인간 실격]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듯한 조금은 자극적인 제목에 책을 열었지만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했다. 이걸 내가 읽어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과 동시에 자신의 비밀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듯한 그의 독백이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인간 실격]은 스물일곱에 흰머리가 희끗해져 마흔으로 보일 정도로 비운 한 요조의 삶을 그려낸 책이다. 엄한 집안. 폐결핵. 미술가로서의 성공하지 못한 삶. 여인과 함께 자살을 시도했지만 자신만 살아남은 첫 번째 자살 시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녀를 자신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아 자발적으로 떠난 두 번째 여인. 자신과 결혼을 했으면서 바람을 피운 세 번째 여인과 그 여인이 보관했던 수면제를 이용한 두 번째 자살. 모르핀 중독. 중독으로 인한 빚과 약사와의 바람. 그리고 기댔던 사람들에 의해 가게 된 정신병원. 알 수 없는 그의 마지막.


사건들만 나열해 봐도 요조의 삶의 무게가 느껴져 글을 써 내려가기가 머뭇거려졌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에서도 자전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다자이 오사무 작가의 삶을 녹여낸 소설이라 책이 아닌 그 사람이 보였다. 시대상을 포함한 그의 삶에 비해 좋아하는 음식 하나로 행복할 수 있는 나의 삶은 그에 대해 얘기하기엔 거만함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깊은 호수에도 수면이 존재하는 법이고 그 수면에 내 얼굴이 비치는 법이니 그 정도의 깊이에서 써 내려가려 한다.


주인공 요조를 표현하는 단어는 ‘익살’이다. 요조에게 익살은 어렸을 적부터 세상과 자신은 다르다고 느낀 그가 엄한 집안 그리고 학교, 그 밖의 세상과 융화되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융화는커녕 바람, 배신, 중독, 자살 이러한 것들을 숨겨 놓는 방패막이될 뿐이었다.

요조가 왜 이렇게까지 망가지기 시작했는지는 본편 보다 후반에 나오는 [조소]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유다의 시선을 통해 더욱 와닿았다.

베푼 만큼 인정받고 싶고, 자신만이 독차지하고 싶은 사랑.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은 순수하고 누구보다 큰 사랑이라 말하는 모순된 사랑. 결국 유다의 구애의 끝은 배반이었지만 그럼에도 예수가 한 번이라도 유다를 따뜻하게 바라봐 주고 고맙다며 안아줬더라면 상황이 다르게 흘러갔을까 하는 사랑. 마냥 비난만으로 채우기엔 어느 한구석이 안쓰러운 사랑.

이러한 요조와 유다의 모습들은 영화 [조커]를 생각나게 했다. 가족과 세상에 사랑받지 못한 삶. 여인과의 사랑에 실패하는 삶. 세상과 융화되기 위해 웃음으로 노력하는 삶. 특히 기억되는 장면이 스탠딩 코미디 관에서 다른 사람들이 웃는 타이밍 보다 한 박자 늦게 웃는 아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점점 악으로 채워진 그가 선택한 조커의 삶.

이어 이런 조커의 모습에선 내가 보였다. 엄하고 기준이 높아 칭찬에 인색했던 부모님. 티브이에 나오는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개그맨과 웃는 방청객들을 액자 보듯이 보던 모습. 그러나 모임에서 농담을 하면 웃음을 내보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웃는 연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 겉으론 웃음꽃이 피었지만 메말라 가던 속. (차이점이 있다면 다행히 아직 조커가 되진 않았다.)


왜 그렇게 우리들은 융화되지 못했을까. 뒤돌아 생각해 보면 한편으론 오만이었던 것 같다.

사전적 의미로 나오는 건방지거나 거만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 혹은 달라야 한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다. 책에서도 다자이 오사무 작가가 ‘선택받은 자’에 자부심이 있다는 설명이 있다.

[ 스물일곱 살에 발표한 첫 창작집 [만년]의 권두를 장식한 단편 [잎]의 서두에 [선택받은 자로서의 황홀과 불안 / 그 두 가지가 내게 있으니 ]라는 베를렌의 시를 인용한 다자이는 이 시구대로 생활 무능력자라는 열등의식과 함께 남보다 뛰어난 ‘선택받은 자’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

그러나 이율배반적인 명제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다자이가 정신분열까지 왔다고 한다.

나 또한 다자이처럼 혹은 소설 속에 요조처럼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껴왔다. 그것들이 쌓여 ‘나는 지금 세상에 맞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나의 시대에는 엠비티아이라든지 유튜브라든지 그런 것들을 통해서 비슷한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세상이 넓어지면서 특별해 보였던 것 또한 그저 사람일 뿐이란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외계인 마냥 완전히 다른 개체나 잘 못 태어난 게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를 자고 먹고 쉬고 하는 그런 사람.

이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더라면 나만의 집에서 창문을 통해서라도 인사를 건넸을 텐데. 막연하게 ‘다르구나’라고 느끼고만 있으니 그런 것이 공허함이 되고, 그 벽이 고립을 시켜 서서히 메말라 갔던 것 같다


앞으로도 세상과 인사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름의 생각을 해본 것은 ‘세상 속의 나’라는 존재에서 ‘온전한 나’라는 존재로 돌아갈 곳을 만드는 것이다. 꼭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하고 아늑하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내 기분과 상관없이 내가 갈 수 있는 곳.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도 어라, 도착했네 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하루 종일 놀이터에서 흙장난과 연극놀이에 빠져 옷이 지저분해졌는지도 모르다가 해가 진 것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놀이터를 뛰쳐나가도 도착할 수 있는 곳.

혹시나 요조처럼 세상과 융화되기 위해 익살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 익살에 지쳐 자신에게도 회의감이 오는 이들이 있다면, 익살이 없는 온전한 자신이 있을 곳을 만들어 봤으면 좋겠다.

그곳이 익살 뒤에 숨은 삶에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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