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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보다 마흔 Aug 09. 2022

여름 언덕에서

언덕 너머를 볼 수 있다면...



오늘 새벽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시집의 저자, 안희연 시인의 산문집을 읽었다. 여느 수필가와 마찬가지로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일상 이야기다. 다만 시인의 시각으로 보는 단어에 대한 고찰을 일상과 어우러지게 담았다.

시인의 자질은 낯익은 물건을 새롭게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새롭게 본다는 것은 시각이 우선한다는 이야기다. 새롭게 보고 시각 너머에 있는 철학과 가치와 메시지를 담아내야 한다. 먹이사슬의 최상위 단계에 포식자가 점령하고 있듯, 절제되고 정제된 시가, 모든 문학의 제일 높은 곳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저자의 글 속에 '라페'라는 한 꼭지가 있었다. 라떼는 들어봤어도 라페는 생소한 단어다. 당근을 채 썰어 소금에 절인 후 몇 가지 소스를 넣어 먹는 샐러드 종류라고 한다. 특히나 지금 같이 더운 여름에 가스 불 사용하지 않고도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자주 해 먹는다고 한다. 꼭 라페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 날, 아무 생각 없이 채썰기에 몰두할 수 있어 자주 만드는 음식이라고도 한다. 같은 고민을 같은 방식으로 해결한다는 생각이 들어 공감된다.

'입맛 없다'라는 엄마, 아빠의 말을 자주 듣는다.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부분이다. 가까이 있어 음식을 해 드릴 수도 없고, 자주 가서 맛있는 음식을 같이 먹을 처지도 못 된다. 기껏 한다는 게 손가락질 몇 번으로 택배를 보내 드리고, 전화를 하는 게 전부다. 그러곤 며칠 위안거리로 삼는다.

'입장'이란 건, 권모술수 같아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라는 시처럼, 입장이라는 것 또한 한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지 않고선 이해될 수 없는 감정이다. 한 사람의 출생부터 현재까지의 삶이 담겨있어 입장을 이해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엄마 나이가 돼 보지 않은, 살아 펄떡거리는 나 또한 엄마의 입맛 없음을 이해할 수가 없다. 위로도 되지 않는 간섭을 애정이라 착각하고 전화를 끊음과 동시에 엄마의 입장은 잊어버리고 만다.

'입맛', 나에겐 오지 않을 단어인 줄 알았다. 가질 수 없는 꿈처럼, 다시 올 수 없는 과거처럼 나에게 오지 않을 줄 알았다. 늘 입맛이 달았고 침샘은 훌륭했고, 소화도 눈부셨다. 맛있게 한 그릇을 먹고 나도 뒤돌아서면 어느새 위(胃)는 비었고 점심을 먹으며 저녁 메뉴를 생각했다. 가족을 위해, 소중한 내 주위 사람을 위해,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고 시간 아깝지 않았다. 내 즐거움이 음식에 고스란히 녹았고, 가짓수와 양으로 내 건강함을 표출시켰다. 남편의 퇴근길을 즐겁게 해주려 흔쾌히 저녁상을 준비했고 단골손님을 대접하듯 마음을 다했다.

"사장님, 오셨어요?"

마담처럼 농담을 하면,

"이 집이 이 동네서 제일 잘한담스?"

하고 남편이 맞장구를 쳤다. 남아도는 에너지를 나누어야 했다. 수고한 하루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험난한 하루를 풀었다. 그걸 즐길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충분히 힘이 넘쳤다.

"여보, 오늘은 당신이 김치찌개를 좀 끓여줘, 나 입맛 없어."

"와, 요새 내~입맛 없다 하노?"

남편에게 음식은 곧 사랑이다. 아내와 엄마의 의무는 음식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정에 소홀한 아버님으로 인해 어머님이 경제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다섯 자녀는 불만마저 침묵으로 동의했다. 눌러뒀던 음식에 대한 갈증을 나에게서 해소하고자 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남자가 쪼잔하게 음식에 목숨 건다고 생각했다. 한참 후에야, 남편에게 음식은 그저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내팽개쳐졌던 어린 날의 보상이란 걸 알았다. 그걸 몰라 수없이 갈등했고 또 반대로 껄끄러운 감정을 해결해 주는 무기가 되기도 했다.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음식이 제일 우선인 남편의 불만은 당연하다. 입맛 없음이 제일 큰 이유이고, 그보다 우선한 일이 생겨버렸다. 활동량이 급격히 줄었고 몸보다 손가락만 쓰는 일을 하고 있다. 가족들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지만, 먹을 게 나올 리 없다. 안주인 배가 고파야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 텐데, 움직이질 않는다.

남편의 김치찌개는 늘 옳다. 해줄 거면서도 늘 투덜대는 평소와 달리, 군소리 없이 바로 요리를 시작한다. 재료를 찾아 꺼내주는 일말의 양심은 있다. 고기보다 김치가 많길 원하지만, 그것까지 바라진 않는다. 그냥 하는 대로 놔둔다. 밥반찬보다 술안주에 가까운 찌개다. 짭짤하고 단맛 나는 식당 음식 맛이다.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 호기롭게 숟가락을 들었으나 그때 그 맛이 아니다. 찌개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입맛이 문제다. 일찍 숟가락 놓기가 미안해 젓가락으로 남편의 진도를 맞춘다. 마지막으로 남겨야 할 음식이 있다면, 그건 당연히 김치찌개라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감동 없는 찌개가 될 수 있다니, 의아하다.

입맛 없다는 엄마가 생각난다. 이런 상태가 계속됐다는 말인가? 이토록 잔인한 게임이 계속된단 말인가? 나도 이제 시작이란 말인가? 벌써?

날씨 탓이라 위로한다. 늦은 오후에 친구랑 먹은 팥빙수가 원인이라고 핑계 댄다. 곧 왕성한 식욕이 돌아올 거라고 억지를 부린다.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나를 달래본다.

국밥집을 할 땐, 하루 다섯 끼를 먹었다. 그래도 어느새 소화가 다 돼서 또 먹을 걸 찾았다. 그만큼 움직임이 많았고 활기가 넘쳤다. 손님 없는 틈에 먹어야 그나마 끼니를 때울 수 있었고 그날 열량은 그날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 소진해버렸다. 왕성했던 식욕과 넘치던 에너지가 그리운 날이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닭과 달걀처럼 어느 게 먼저인지 늘 헷갈렸다. 입맛이 떨어지니 먹기 위해 사는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그토록 즐거웠던 일이 이토록 무의미해질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안주인은 여름 언덕에서 주춤하고 있다. 사방이 물웅덩이이고 발이 푹푹 빠져, 오르기 힘든 언덕 앞에 서 있다. 이 언덕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간다는 시의 첫 구절을 음미해 본다. 긴장돼서 입맛마저 사라진 이 여름 언덕 너머에 새로운 희망이 있을 거라 상상한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는 마지막 구절을 꼭 안아본다.

덧) 매일메일은자 7-19화이었습니다.

아들의 최종 합격 발표를 앞두고 출간 계약 연락을 받아 기쁨보다 불안이 컸던 지난주였습니다.

그때 쓴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https://blog.naver.com/silviad/22283386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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