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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Feb 17. 2017

인도는 사람입니다

호스펫 1




추억과 그리움 중 어떤 게 더 가벼울까요?

추억과 그리움 중 어떤 게 더 높은 음계일까요?


그 날 역시 햇빛은 빠닥빠닥 새 돈 같은 소리를 내며 나뭇잎에 부딪혔습니다.

구름 두어 근 끊어다 펄펄 끓여서 비로 만들고 싶던 날이었지요.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 건 비단 여행뿐은 아닐 겁니다.

호스펫은 인근의 함피로 가기 위한 경유지일 뿐인 작은 도시입니다.

그 흔한 사원 하나가 없는 곳이지요.

그러므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기차를 타고 호스펫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나 릭샤를 타고 함피로 갑니다.

함피에도 호텔이 있습니다만 야간열차에서 내려 또 뭔가를 타고 간다는 게 무척 피곤할 거라는 생각에 숙소를 호스펫에 정했습니다.

예약한 호텔은 역에서 350m, 거리 구경을 하며 슬슬 걸어갔지요.

물론 몰려드는 릭샤꾼들을 씩씩하게 물리쳤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세탁소로 짐작되는 가게가 여럿 보였고 그때까지는 그냥 '세탁소구나' 했을 뿐이었죠.

걷다 보니 호텔이 보였습니다.

아침 8시인데 엑스트라 차지 없이 룸키를 주더군요.

얼마나 다행인지요, 일단 씻을 수 있으니까요.

여기도 시골 인심은 후한가? 하며 방을 안내받았습니다.



갈대가 빼곡한 강과 강둑이 펼쳐진 풍경이 넓은 통창 가득 시원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탄성이 나오는 풍경이었지요.

널찍한 방은 5성급 호텔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고 안락했습니다.

3박에 17만 원, 그런 쾌재가 없었어요.

서두를 것 없이 넉넉한 시간이 주어진 호스펫, 오늘 하루는 그냥 빈둥거리며 놀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퉁가바드라 강 가에는 울긋불긋한 꽃들이 피어납니다.

빨래하는 사람들이에요.

점심도 먹을 겸 밖으로 나가 창으로 보이던 강 둑을 따라 걸었습니다.

뭄바이와 바라나시의 도비 가트만큼의 숫자는 아니지만 그곳에도 도비왈라들이 무척 많더군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세탁 서비스를 맡긴 터라 내 옷도 저기 어디쯤에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요.

산더미 같은 빨래를 돌 위에 내려치고, 알 수 없는 세제에 담그고 헹구고 물을 짜는 손길이 분주합니다.

원래 도비왈라는 남성이지만 그곳엔 아낙들이 더 많더군요.

물에 잦은 사리들이 치렁치렁 감기지만 그들의 손놀림은 능수능란했습니다.

태양은 조도를 한껏 높이고 피부는 타는 듯 뜨거웠습니다.

엄마 따라온 아이들은 목욕한 지가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꼬질꼬질했지만 그들의 웃음만은 더없이 맑고 깨끗했어요.




집집마다 빨래가 걸려있고 줄자를 목에 건 테일러가 멋지게 웃어줍니다.

두 분이 오래된 친구라는 걸 한눈에 짐작할 정도로 분위기가 닮았네요.

연세에 비해 손이 거칠지 않은 걸 보니 별 고생은 하지 않은 듯 약지에 끼고 있는 빨간색 알 반지와 주황색 소원 팔찌가 썩 잘 어울립니다.

정갈하게 다림질한 흰 셔츠를 입은 테일러 뒤로 그가 만든 셔츠들이 반듯하게 개켜서 걸려있네요.

파란 초크로 패턴을 만들고 계십니다.

패턴에 따라 마름질과 바느질을 마치면 누군가의 근사한 셔츠가 만들어지겠지요.

테일러 또한 아티스트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도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긍심이 대단한 것 같아요.

그들의 눈에는 힘이 있습니다.

물소(버펄로)가 끄는 마차가 많이 보입니다.

원래 푸른색인지, 푸른 칠을 한 건지 모릅니다.

아무튼 멋진 뿔을 관처럼 쓴 물소 두 마리가 그들의 자가용이며 트럭인 셈입니다.

신기할 정도로 수염과 셔츠와 타월의 색깔이 한 세트를 이루는 할아버지 이마에는 노란 줄과 빨간 빈디가 찍어져 있습니다.

노인들의 미소는 한결같이 선하지만 뭔가 당당하게 느껴지는 자존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소가 여물을 먹고 있습니다. 메뉴는 꽃탕, 노랗고 빨간 꽃잎이 둥둥 떠 있는 꽃물을 먹네요.

위가 네 개나 되니 배탈은 나지 않겠지 위안합니다. 



흰색 다바왈라 모자에 하얀 머리칼, 짧지만 하얀 수염, 하얀 티셔츠와 하얀 도티.

그러니까 그의 드레스 코드는 올 화이트예요.

빨간 실로 만든 목걸이와 맨 발이 포인트입니다.

대부분의 인도 남자들은 카라가 달린 셔츠를 입는데 카라가 없는 티셔츠를 입은 것부터 남다른 할아버지의 근육이 제법 탄탄해 보입니다.

여러 컷의 사진을 찍었고 그 모두를 보여드렸더니 내 손을 불쑥 잡습니다.

얼마나 꼭 쥐었는지 손가락에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릿저릿하더군요.

사진이 맘에 드셨는지 내게 다가오는 물소를 저지시키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표정을 보세요.

한 고집, 제대로 하셨을 법한 얼굴입니다.

그러나 아내 사랑이 유달랐을 것 같은 생각도 드네요.



개업한 이동통신 vivo 매장 앞에서 T셔츠를 맞춰 입은 청년들이 댄스를 합니다.

연습을 많이한 듯 그럴싸하게 맞추네요.

그중 한 사람은 민망한지 자꾸 수줍게 웃습니다.

신나고 흥겨운 음악이 맘에 들어 그 속에 껴서 한 바탕 춤을 추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신에게 꽃 목걸이를 바치는 걸 복으로 생각합니다.

꽃송이만 댕강 잘린 장미꽃들이 색깔별로 비닐에 담겨 있어요.



권총과 카우보이 모자만 씌워놓으면 영락없는 황야의 무법자 같은 포스의 아저씨가 빈 자전거 수레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네요.  



'나는 인디언이다' 하는 포스의 아주머니가 활짝 웃습니다.

큼지막한 코걸이와 검은 머리카락에 달린 쇠붙이가 무거울 법한데 아랑곳하지 않네요.

안 그래도 갖가지 색깔이 화려한 옷 위엔 금사로 짠 숄 까지 두르고 있어요.

빈 수레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심심하던 차에 잘 만났네 하듯 일어서서 갖은 포즈를 다 취합니다.


 

삶의 현장은 모두 다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듯 자연스럽습니다.

오랫동안 물든 이유겠지요.

낡고 뜯긴 천막 따위가 내 눈에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것들 또한 오랜 세월 충직한 개처럼 비바람을 막아주는 본분을 다했을 겁니다.

처음엔 튼튼하고 빛나는 청춘을 뽐내며 걸렸을 테지만 이제 기운 쇠한 노인처럼 힘겹게 자리를 지킬 뿐이라 결코 탓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연스러운 게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아기들과 소녀들의 웃음이 꾸밈없는 자연이기에 더욱 빛나지요.

웃음은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약입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인도는 사람이 주인입니다.

아니, 인도는 사람입니다.


  

새벽닭이 우렁차게 울어댑니다.

여기는 라오스 방비엥이고 동 트기 직전이라 컴컴하네요. 

새벽을 가르며 호스펫의 겨울 판화를 찍었습니다.

오늘 또한 그리움의 하루가 되길 바라네요.


2017.2.17. 06:20  방비엥 쏭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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