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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외출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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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14. 2017

로키의 차가운 심장, 루이스 호수

2017  Lake Louise, Banff preview trip



'싶음'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나 이런 순간이 있다. 

'더 바랄 게 없다.' 

이런 감정은 생각보다 쉽게 느껴진다.

삶이 한없이 복잡하고 지난한 듯하지만 의외로 단순하고 소박하기도 하다는 뜻이다.


슬프면 눈물이 난다.

기뻐도 눈물이 글썽거려진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음악을 보고 들어도 눈물이 난다.

감동은 사소함에서 시작한다.

하늘을 볼 수 있는 눈, 

엄마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걸을 수 있는 두 다리,

잊고 살아가는 고마움이 많다.

 

슬픔이 아름다움이라는 뼈를 품고 자라는지, 

아름다움 속에 슬픔의 그림자가 더불어 사는지,

슬픔과 아름다움은 암수 한 몸처럼 하나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유키 구라모토의 '레이크 루이스'를 맨 처음 들었을 때에도 그랬다.

피아노에서 빙하 냄새가 났다.

팔각수로 만들어진 얼음을 조각한 피아노처럼 고드름 소리가 났다.

피아노를 더 맘에 끌리게 한 것은 음악의 제목들이다. 

추상(Reminiscence)이라는 앨범 속의 A mirrage on the water, Sonnet of the woods, Sighing Wind 같은 감성적인 제목들은 피아노로 쓴 한 편의 시요, 수채화였다. 

C&L Music은 음반을 꾸준히 발매했고 그때마다 우표 수집하듯 그의 음반을 사곤 했다.

앙드레 가뇽, 케빈 컨,  데이비드 랜츠에서 이탈리아의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까지 뉴 에이지 음악은 누구나 편히 걸 수 있는 귀걸이 같은 음악이다. 


Lake Louise-Yuhki Kuramoto
Elegy for the Arctic(북극을 위한 비가) -Ludovico Einaudi



그의 음반이 우리나라에 첫 발매되었던 1998년, 

루이스 호수는 그저 캐나다 어드메에 있는 호수라는 것뿐 더 이상의 궁금증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그저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에서 호수가 보였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랬다.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마침내 루이스 호수를 만나러 간다.

레이크 루이스는 더 이상 내 마음속에 가두어두지 않아도 되는 로키의 차가운 심장이다. 

  

  

  로키산맥의 대표적인 두 도시, 밴프와 재스퍼는 약 3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아이스필드 파크웨이(Icefield Parkway, 230km)라 불리는 그 길을 운전하며 맘 내키는 대로 가다 서기를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구칠 것이다. 그저 평범한 2차선 도로를 달릴 뿐인데 그토록 행복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며 흥분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능력이 제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자연이 보여주는 풍경이다. 마치 다는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훔쳐갈 수는 없다는 듯, 제 아무리 용을 써도 카메라에 그 모두를 담을 수 없다. 담았다 하더라도 아름다움을 오롯 나타낼 방법도 없다. 그저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라는 듯, 자연은 카메라에게 모든 걸 내어주지 않는다. 게다가 아이스필드 파크웨이에는 사람과 자동차를 두려워하지 않는 온갖 야생동물들이 명품 카메오처럼 나타난다. 곰이나 거대한 뿔을 가진 엘크가 등장해주면 꿈을 꾸듯 다른 세계를 실감할 것이다. 


   


  레이크 루이스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디어 로지에서 1박을 계획한 것은 오직 새벽 산책 때문이다. 달이 내린 호수의 정취도 좋겠지만 안개가 자욱한 새벽의 호수가 늘 그리웠다. 그곳의 안개가 아름답다거나, 안개가 자주 드리워진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는 없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하고 기다렸다는 듯, 도도한 안개를 만나리라 생각한다. 로키의 여름 속에는 4계절이 모두 들어 있다. 밴프의 새벽은 섭씨 5도 남짓, 쌀랑이 아니라 진저리가 처질 정도로 오싹한 한기를 느낀다. 후드 집업에 얇은 패딩 정도는 필요하다. 미스트처럼 뿌려주는 안개비의 서늘함에 얼굴을 맡긴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기다려온 만큼 그보다 좋을 수없으리라 생각한다.



  루이스(Louise) 호수는 해발 1,732m에 위치하며 길이 2.4Km, 폭 1.2km, 최대 수심 70m의 거대한 호수이다. 빙하의 침식 활동으로 웅덩이가 생긴 곳에 얼음이 흘려내리면서 만들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보통 1cm의 빙하가 만들어지려면 눈 100미터가 필요하다고 하니 더더욱 경이롭다. 유구한 시간의 침식에 나 자신의 미미함을 체감한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신비로운 에메랄드 빛은, 빙하에 깎인 미세한 진흙이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햇빛에 반짝이는 까닭이다. 물빛은 일조량이나 햇살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바람이 스케치하고 태양이 색칠하는 호수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단 한 번도 같지 않다. 


  

  원래 이 호수는 그곳 원주민인 스토니 인디언들이 ‘작은 물고기의 호수’라고도 불렀다. 그 후 이 호수를 처음 발견한 톰 윌슨(1859-1933)에 의해 ‘에메랄드 호수’라고 불렸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넷째 딸 루이스 캐롤라인 앨버타 공주의 이름을 따서 지금의 이름인 루이스 호수로 바뀌게 되었다. 캐나다의 앨버타 (Alberta)라는 州 명 역시 루이스 캐롤라인 앨버타 공주의 이름에서 따다 지어졌는데 루이스 공주가 론 후작과 결혼하여 서부 캐나다를 여행할 때 이 지역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녀의 남편이 캐나다 정부에 자신의 신부의 이름을 따서 앨버타 주라고 부르게 되었고 호수 이름도 루이스 라 불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공주는 레이크 루이스에는 와본 적이 없다고 한다. 

  

  페어몬트 샤토 레이크 루이스 호텔은 전 객실에서 루이스 호수가 보이는 기막힌 위치에 있다.  호텔 로비의 한쪽 벽에 루이스 공주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가끔 단체 관광객들이 호텔 내부 투어를 하듯 왁자지껄하게 로비를 누비고 다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호텔의 레이크 뷰 라운지에서 에프터눈 티를 즐길 수 있다. 일찌감치 창가 좌석을 예약 요청 이메일을 보냈지만 오는 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답장을 받았다. 에프터눈 티가 시작되는 시점에 라운지에 가야만 한다. 아치형 유리창으로 호수가 가득 차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 속의 꽉 찬 충만, 그 순간 또다시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행복함이 가득할 것이다. 하얀 자기에 담긴 얼 그레이의 옅은 붉음을 한 모금 마신 후 3단 트레이에 얹힌 달콤한 케이크와 고소한 쿠키를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 가득 달콤함이 번지며 모든 근심과 복잡했던 상념들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레이크 루이스에서 밴프까지는 93번 고속도로를 대신 오래된 도로 보우 밸리 파크웨이(50km)를 이용하기로 한다. 짧은 거리지만 로키산맥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음이다. 수시로 차를 멈추고 길 양쪽에 우뚝 솟은 산과 암벽, 나무들이 장관을 볼 터다.   


   

  해발 1123m의 설퍼산 중턱에서 2281m 높이 전망대까지 곤돌라를 타고 오르는 시간은 단 8분, 지금까지 봐왔던 산들을 모두 모아놓은 듯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로키는 알프스를 50개 모아 놓은 것 같다는 어느 등반가의 말이 실감 나는 곳이다. 전망대에는 <스카이 비스트로>가 있다. 곤돌라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까지 주어지는 시간은 최대 100분, 하지만 레스토랑을 이용하면 200분 동안 머무를 수 있다. 스카이 비스트로의 음식은 상상외로 비싸지 않다. 예약 요청 메일을 보냈으나 디너만 예약을 한다는 답장을 받았다. 11시 30분 곤돌라를 탈 예약했으니 곤돌라에서 내리자마자 브런치를 먹고 천천히 트레킹을 할 생각이다. 이름마따나 하늘에서 즐기는 식사는 기분 탓만으로라도 음식이 맛이 없으래야 없을 수 없으리라 짐작한다.


   

  인디언 말로 '죽은 자들의 영혼이 만나는 물'이라는 뜻의 미네완카는 밴프에서 가장 큰 호수이다.  크루즈를 타고 호수 위를 달리다 보면 멀리 로키 산맥이 끝나는 지점이 보인다. 미네완카는 로키 산맥의 끝 지점에 있는 호수이며 그 너머에 캘거리가 있다. 어딜 가나 호수 천국인 로키에서의 1주일이 애인과의 함께한 시간처럼 짧게만 느껴질 터이다. 



  밴프에서 캘거리로 가는 도중에 만날 수 있는 모레인 호수를 빼놓을 수 없다.  1899년 이 호수를 발견하고 '모레인'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윌콕스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이보다 더 아름다운 호수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풍경을 음미했던 삼십 분의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토로했다. 월터가 어째서 이 호수를 보고 경탄해마지 않았는지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호수 위로 얼음으로 덮인 웬켐나 산은 가파른 벽처럼 호수의 동쪽을 에워싸고 있다. '모레인(moraine:빙퇴석) 호수'라는 이름 때문에 빙퇴석이나 빙하로 형성된 호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호수는 인근 바벨 산에서 내려온 거대한 암석으로 만들어졌다. 무지갯빛 아름다운 푸른색 물빛은 암분이라는 미세한 빙력토 입자 때문이다. 이 입자들은 여름철 빙하가 녹은 물에 섞여 호수로 흘러든다. 입자는 가시광선의 모든 스펙트럼을 흡수하지만 푸른색만은 그대로 반사한다. 눈 시리게 푸른 물빛만 보아도 이 호수를 '로키 산맥의 보석'이라고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캘거리 공항으로 향한다. 로키의 발이 되었던 렌터카를 반납하고 몬트리올로 날아갈 거다. 프랑스 분위기 가득한 몬트리올과 퀘벡은 어떤 얼굴로 내 가슴을 뛰게 할지….      


모레인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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