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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3. 2023

구글맵도 길을 잃는 곳

22.Venazia






피렌체를 떠나기 전 날 밤, 베네치아의 호스트 토만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내일 당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았어요.'


숙소는 산타루치아 역에서 700m, 그만하면 가까운 거리이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다르다.

곳곳이 물길이므로 다리의 숫자는 무려 400개가 넘는다.

기차역에서 숙소까지의 상세 경로를 보니 다리 2개를 포함해서 통과해야 할 계단이 400m.

우선 역에서 무조건 건너야 하는 코스티투치오네 다리는 100m가 넘는다.

게다가 캐리어는 2개.

혼자서 그 많은 계단을 오르고 내려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호스트에게 캐리어 옮기는 것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 달라고 요청을 했다.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했었는데 전날 반가운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나를 도와줄 사람은 이탈리아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외국인이고 영어나 이태리어는 전혀 못한다고 한다.

오직 스페인어만 할 수 있는 그 사람을 잘 만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서 있을 장소를 찍은 영상을 보내왔다.

거기서 내 이름이 써진 종이를 들고 기다릴 거라고 했다.

기차에서 내려 토만소가 알려준 장소로 가니 나보다도 키가 작은 남자가 내 이름이 써진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남미 어느 쪽 사람인 듯하다. 그는 대여섯 살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베네치아 산타 루치아역 정면의 수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다리는 상상한 것보다 컸고 따라서 계단은 수없이 많았다.

트렁크를 건네받은 그는 다람쥐처럼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빠르기로 치면 내 걸음도 뒤지지 않는데 도저히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나를 기다리기 일쑤였다.


숙소에 도착하여 그에게 10유로를, 딸내미에게는 피렌체에서 샀던 애플파이를 주었다.

내가 떠나는 날 아침에 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스페인어 번역기를 이용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딸과 함께 돌아갔다.  



바깥문을 열고 들어가면 커다란 안뜰이 있다.

그곳에도 재스민 꽃이 담벼락을 휘감고 찬란히 피어 있었다.

뜰 한쪽에는 작은 장미 덩굴과 오래된 우물, 그리고 잘 생긴 올리브 나무도 빠질 수 없다는 듯 당당하게 서있었다.


이탈리아에 유독 재스민꽃이 많은 이유가 뭘까?

순백의 재스민 꽃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많이 심었으며 마리아의 순수함과 연관이 있고 종교화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꽃은 장미였다.


최근에 리모델링을 했다는 숙소의 침구는 5성급 호텔 못지않게 고급이고 옷장과 책상도 묵직한 원목가구였다.

창문밖의 수로에는 작은 배 한 척이 보였다.

가전이 모두 갖춰진 심플한 주방과 욕실도 맘에 들었다.

혼자 지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숙소가 맘에 들었다.









    

우선 물과 몇 가지 식재료를 사 온 후 잠시 쉬기로 했다.

혼자 여행할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역시 음악이다.

어떤 날은 슈베르트 D.929로 시작하고 어떤 날은 Pale blue eyes, 레너드 코헨의 famous blue rain coat를 듣는다.

그날은 fly me to the moon을 여러 번 들었던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는 팬텀 싱어 4의 영상을 가장 많이 들었다.


' 나가 볼까?'


목적지 없이 걸어볼 참이다.

 

작은 광장을 지나니 수로를 끼고 있는 좁은 골목 레스토랑에는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다리를 건너 이 골목 저 골목,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이미 작정하고 나선 터였다.

아름다운 골목과 다리가 무시로 나타날 테고 아름다운 풍경은 이어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건물 벽에는 간간이 리알토 다리, 산 마르코 등의 방향을 알리는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다.

한 번도 똑같지 않은 풍경을 선사하는 수로와 다리들을 건너 좁은 골목을 따라갔다.

심심찮게 나타나는 거리 악사들의 비발디 연주를 들으며 보헤미안처럼 걷는 일이 이렇게 즐거울 일인가 싶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운하가 양장본 연감 같다면 베니스는 싸구려 노트에 연필로 그린 그림일기 같다.

표정을 알 수 없는 화려한 가면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지천이다.

베니스는 얼굴을 감춘 도시이며 가면에 취하는 곳이기도 하다.

신분을 가리기 위해 가면을 쓴 귀족들은 곤돌라('흔들리다'라는 뜻)처럼 사랑에 흔들렸을 거다.

그 속에서 태어난 사생아들은 갯벌의 허약한 기반 위에 세워진 물의 도시처럼 힘없이 떠다녔을 것이다.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발이 묶였던 여행자들이 쏟아져 나온 터에 이탈리아 명소들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좁은 수로에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곤돌라들이 교통 체증을 겪고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목적하고 걷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게 되는 곳, 산 마르코 광장.

저마다 행복한 미소를 담뿍 담은 여행자들이 여기저기서 셔터를 누르기에 바쁘다.

위풍당당한 산마르코 성당은 여전히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산 마르코 광장의 꽃, 카페 플로리안에는 하얀 턱시도를 입은 악사들이 대부의 테마곡을 연주하고 있다.

1인당 6유로의 자릿세를 개의치 않는 손님들이 기분 좋게 아페롤 잔을 기울이고 있다.

두칼레 궁전, 산 테오도르 조각상이 얹혀 있는 기둥, 베네치아의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상, 바다 너머 산 마조레 성당, 그 모두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반가웠다.











7년 전 묵었던 호텔 파가니니를 찾아보고 싶어 스키아보니 해안 도로로 들어섰다.

그곳이 잊히지 않는 이유는 베니스에서 보낸 첫새벽에 들었던 소리 때문이다.



찰진 소리가 들려왔다.

두께감이 있는 둔탁한 울림이다.

불규칙하지만 나름의 운율과 정돈감도 있다.

떡메 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깊은 동굴에서 울리는 북소리 같기도 했다.

그 불투명한 소리의 정체가 궁금했다.

창문을 열었다.

검푸른 바다와 잉크처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말뚝에 매어 있는 검은색 곤돌라,

그들이 바닷물에 부딪히며 짓는 소리였다.

태어나서 많은 소리들을 들어왔다.

그러나 그렇게 찰진 자연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명품 악기로 연주하는 그 어떤 즉흥곡보다 믿음이 가는 소리였다.

바다와 바람과 곤돌라들이 만들어낸 교향곡이었다.  









광장의 남쪽 끝으로 나가면 곤돌라들이 모여있는 탑승장이 있다.

그 기억을 되살려 그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슬슬 돌아가야지 싶었다.

구글맵에 숙소 주소를 입력한 후 이동 방법은 도보로 설정했다.

2km, 30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걱정이나 의심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숙소에 돌아가 저녁을 만들어 먹고 다음 날 스케줄을 정리한 후 자면 되니까...








1km쯤 걸었을까?

건널 수 있는 다리도 없는 막다른 수로에 도착했다.

구글맵은 거기서 바포레토(수상버스)를 타라고 안내했다.

하지만 그곳은 작은 정류장이라 티켓 판매소나 자동판매기도 없었다.

설상가상 사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그 주변 골목에는 인적도 뜸했다.

스마트폰의 배터리는 20%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중간에 보조 배터리도 다 쓴 상태였다.

그곳을 빠져나와 한참을 다른 골목을 향해 한참을 걸었지만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구글맵에 주소를 산타루치아 역으로 다시 설정하고 걸었지만 아까와 똑같은 곳으로 안내했다.

폰까지 꺼져버리면 그야말로 낭패다.

당황스러웠다.

그때 스친 생각이 '리알토 다리'

아까 숙소에서 산 마르코 광장으로 갈 때는 리알토 다리를 건너지 않았었다.

하지만 리알토 다리는 대운하를 연결하는 다리니까 그 다리만 건너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 맵에 다시 리알토를 목적지를 설정한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저 멀리 다리가 보였다.

'휴~ 살았다.

리알토 다리에서 숙소까지는 1.7km

스마트 폰의 배터리는 10%도 채 남지 않았지만 일단 대 운하를 건너왔으니 안심이다.

만일 배터리가 꺼진다 해도 산타루치아 역은 사람들에게 물어서라도 찾아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다리 너머로 반짝이는 꼬마전구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레스토랑의 불빛이 보였다.

몇 시간 전에 지나온 운하의 골목이었다.

그 후 베니스에서는 보조 배터리는 물론이고 충전기까지 챙기곤 했다.

그날 이번 여행의 최고 기록이 바뀌었다.(도보 거리 17.3km)

이대로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에 도전해도 되겠는걸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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