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Venezia, Peggy Guggenhe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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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파스를 세워놓은 것처럼 알록달록한 부라노 섬에 갈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일단 집을 나서면 애플파이나 크루아상을 곁들인 커피 한 잔을 마시곤 한다.
피렌체에 있을 때부터 지속된 일종의 루틴이다.
산타루치아 역 내에 있는 카페테리아(Bistrot Santa Lucia)로 향했다.
넓고 테라스 좌석도 있으며 커피 양도 많고 게다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도 있다.
베니스를 떠나는 아침까지 매일 들리는 단골집이었다.
이탈리아의 악명 높은 소매치기들이 많이 사라진듯함이 느껴진다.
곳곳에는 경찰들이 서있고 CCTV에 찍힌 소매치기들의 사진이나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표시가 곳곳에 붙어있었다.
부라노 섬은 본섬에서 약 한 시간이 걸리며 바포레토 노선도 여러 가지가 있다.
내 위치에서 가까운 페로비아를 찾아가서 타면 된다.
나는 무라노 섬까지 가서 다시 부라노로 가는 바포레토오 바꿔 탈 예정이다.
무라노 섬은 유리 공예가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 별로 관심이 없다.
무라노 섬은 바포레토 선착장이 여러 군데였다.
종점에 다다르면 사람들이 모두 내릴 테니 그때 따라 내릴 생각으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 보니 바깥 풍경이 이상했다.
'여기 분명 아까 지나간 곳인데...'
바포레토는 어느새 무라노섬을 떠나 다시 본섬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긴장을 아예 놓아버렸거나 방심한 게 틀림없다.
일단 P.Le Roma에서 내렸다.
부라노 역시 인기 스폿이기에 일찍 도착해야 사람들이 적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한가한 시간은 놓쳤으니 다른 곳 먼저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과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으로 가자.'
바포레토에서 내리면 바로 앞에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게 기억난다.
성당 외부 한쪽은 보수 공사 중이라 천막에 가려져 있었다.
먼저 페기 구겐하임으로 향했다.
오픈 시간이 10시니까 아직 붐비지는 않으리라.
7년 전, 도무지 미술관이 있을법하지 않은 작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고 돌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겨우 발견한 곳의 작은 철문에 쓰여있던 그녀의 이름.
'여기가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이라고?'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 그곳은 페기가 30년 동안 살았단 집이다.
원래 이름은 팔라초 베니어 데이 레오니(Palazzo Venier dei Leoni)로 '베니어 가문의 레오니 궁전'이라는 뜻이다.
건축가 로렌초 보체티(Lorenzo Boschetti)가 1751년에 지은 집이다.
원래는 5층 높이로 설계했으나 재정 문제로 중단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 혼잡하지는 않았지만 티켓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약 10명쯤 줄을 서 있었다.
바찌의 특별전이 안내되어 있다.
마거리트 페기 구겐하임(Marguerite Peggy Guggenheim). 1898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구겐하임 가문은 1847년 미국에 정착한 스위스계 유태인 집안으로, 광산업을 통해 대부호가 됐다.
페기 구겐하임은 미모와 경제력, 사회적 영향력 등 모든 것을 갖고 태어난 재벌가의 딸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미국의 뉴욕, 스페인의 빌바오, 독일 베를린의 빌바오, 그리고 베니스의 페기 구겐하임 까지 모두 4곳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솔로몬 R.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의 현대미술 컬렉션에서 출발했다.
페기 구겐하임의 아버지는 벤자민 구겐하임이며 벤자민은 솔로몬 R의 동생이다.
그러니까 솔로몬 R 구겐하임은 페기의 큰아버지이다.
벤자민은 1911년 타이타닉에 승선했다가 침몰 사고로 사망했는데, '신사답게 차려입고 최후를 맞겠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페기는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유럽을 자주 여행했다.
그때부터 미술 작품에 대한 관심과 안목이 높아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13살에 아버지를 잃고 스물한 살에 재산을 상속받은 페기는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재력을 바탕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하였다.
그는 '미술 중독자'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수많은 작가들을 후원하고 미술품을 수집했는데, 그중에서도 잭슨 폴록을 발굴하고 후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39년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그녀의 그림 수집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단 몇 달의 짧은 기간에 뒤샹이 적어준 목록 중 50여 점을 사들였다.
파울 클레,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 당대를 대표하는 현역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모든 유대인 컬렉터들이 다 피신했지만 전쟁의 와중에도 파리로 간 그녀가 그림을 수집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많은 화가들이 새벽부터 그림을 들고 찾아왔다.
전쟁이라는 난장판 속에서 초현실주의 작품의 값은 터무니없이 쌌다.
페기는 그림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의 도움을 요청했다.
박물관 측은 당신이 소장한 초현실주의 같은 현대의 그림은 가치가 없다며 무시했다.
1941년 봄,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 징조가 커짐에 따라 그녀는 그림 수집을 중단하고 뉴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 사 모은 그림들을 안전하게 운송하는 문제였다.
그녀는 궁리 끝에, 그림들을 액자에서 떼어 이불과 옷가지 사이사이에 펴 넣고 꽁꽁 싼 후 이삿짐으로 위장해 통과시켰다.
페기와 함께 미국에 온 건 그림뿐만이 아니다.
나치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마르크 샤갈, 이브 탕기, 막스 에른스트 등 예술가들이 페기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페기는 독일 국적의 초현실주의 막스 에른스트가 미국에서 추방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와 결혼까지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2년을 채우지 못하고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1947년 페기는 금세기 미술 화랑을 접고 뉴욕을 떠나 이탈리아 베니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컬렉션으로 베니스 비엔날레(1948년)에서 전시회를 열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페기는 현재의 미술관이 된 팔라초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를 매입해 1979년 사망할 때까지 30여 년간 그곳에서 살았다.
페기는 그녀의 81회 생일 파티가 끝난 후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무료할 때 읽기 좋은 책이라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챙겨 들고 병원으로 향했지만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사망 후 소장품들은 전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기증되었으며, 이후 그의 저택은 구겐하임 미술관의 베니스 분관으로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The Peggy Guggenheim Museum>'이라는 공식명칭을 얻어 운영되고 있다.
2016년 1월, 베를린의 빌바오 미술관에 갔고
2022년 11월에는 스페인의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에 갔었다.
구겐하임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미술관이 소장한 현대 작품의 수준과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보기만 해도 작가 이름을 떠올릴 정도의 유명한 작품들인 게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마르셀 뒤샹, 호안 미로,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장 메챙제, 르네 마그리트...
그녀의 컬렉션을 살펴보면 재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페기는 예술계의 타고난 금손이었다.
'이 그림이 여기 있구나.'
숨이 멎는 듯했다.
그대로 멈춰 선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 그곳에 있었다.
<빛의 제국 (The Empire of Light )>은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René Magritte: 1898-1967)의 그림이다.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동일한 제목으로 무려 27 작품을 남겼는데 17점이 유화이고 10점은 과슈 작품이다.
마그리트가 작정하고 시리즈로 제작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림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비슷한 작품의 의뢰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빛의 제국'은 공통점이 있다.
주제는 평범한 주택가의 풍경이다.
그런데 하늘은 하얀 구름이 떠있는 한낮이고, 주택이 있는 아래쪽은 가로등이 켜있는 저녁을 묘사하고 있다.
깊은 청색 하늘 아래 구름이 무겁게 매달려있다.
푸른 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나목들이
구름 속에 빠진 듯, 바다에 서 있듯,
촘촘한 안개 그물 속에 행복한 감금이다.
보도블록 사이에 둥지를 튼 이끼,
늘어진 전선의 자유로운 휨,
각이 다른 지붕의 각들,
싱싱한 배추처럼 푸른 나뭇잎 위로 살짝 뿌려진 하얀 눈.
로텐부르크, 로젠달, 안트워프를 지나 브뤼셀로 가는 동안
기차를 타고 간다기보다 3시간 반 동안 상영되는 영화를 즐기듯 한 번도 같은 풍경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모든 어깨의 무게와 고통이 일시에 사라지면서 행복했다.
프랑스도 네덜란드도 아닌, 그러면서 두 문화를 포용한 벨기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맥주를 우유처럼 집 앞까지 배달해 주는 나라, 자기 나라 맥주를 매일 다른 종류로 마셔도 450일이 걸리는 나라, 그 많은 맥주 수만큼이나 많은 글라스까지도 예쁜 나라.
오드리 헵번, 고디바 초콜릿, 그랑플라스, 오줌싸개 동상, 와플, 벨지언 프라이 등등 찾아갈 이유는 많다.
하지만 내가 브뤼셀을 찾은 이유 1순위는 바로 이 사람, 르네 마그리트 때문이다. (2017년 1월)
빛의 제국을 보고 나니 다른 그림들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졌다.
칸딘스키도, 피카소도, 잭슨 폴락도, 심지어 마크 로스코의 그림까지 시들하다.
어느새 나는 빛의 제국 앞에 다시 섰다.
그리고 또다시 한참을 서 있었다.
구겐하임 근처에는 몇 개의 화랑이 있다.
페기 구겐하임에 들어갈 때는 닫혀 있었는데 그새 오픈을 하여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옹플뢰르에서 보았던 몸통이 떨어져 있어 마술처럼 느껴졌던 조각,
그리고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으로 가다가 길에서 본 조각과 같은 작가의 작품이 보였다.
우연히 지나치는 화랑에서 아는 작품을 만나니 반가웠다.
브루노 카탈라노가 만든 여행자 시리즈이다.
모로코에서 태어난 브루노 카탈라노(Bruno Catalano 1960~)는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여
젊은 시절에 선원 일을 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행자'라는 작품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은 몸통 중 어느 부분을 지우개로 지워 버린 듯이 뚝 떨어져 있다.
그 빈 공간 때문에 상체가 공중에 떠있는 듯한 착시현상이 생긴다.
작품들은 대개 가방을 가지고 있는데 가방을 통해 상체와 하체가 자연스럽게 연결돼 물리적
으로 지탱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 특이함 때문에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다.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으로 가던 길에 만난 조각은 연리지를 형상화한 작품인가 싶어 집에 돌아온 후 찾아보았던 작가였다.
토스카나 태생의 작가 안드레아 로기(Andrea Roggi 1962~ )가 만든 '평화의 나무'
나무 둥치의 역할을 하는 두 남녀가 뻗은 두 팔이 나뭇가지로 이어지는 형상인데 나무는 금빛 올리브 열매가 달려있다.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없는 세상을 바라는 강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으로 향하는 골목 끝에서 나지막한 현의 소리가 들려왔다.
성당의 한쪽 벽을 배경으로 화이트 바지와 셔츠를 입고 라피아햇으로 멋을 낸 남자가 무심하게 연주를 하고 있다.
그의 곁을 지키는 건 까만 개 한 마리뿐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낯이 익었다.
그는 나와 같은 바포레토를 타고 와서 같이 내렸던 사람이었다.
개를 데리고 악기를 맨 채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었기 때문에 기억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연주하는 악기가 '류트'
그동안 수많은 버스커들을 보았지만 거리에서 류트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류트는 지금은 거의 사라져 보기 힘든 고악기이다.
물론 그곳이 비발디가 태어난 베네치아이고 비발디의 작품에 류트가 사용되는 곡이 많다는 이유가 있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비발디의 '사계'에도 류트가 포함되지만 류트 연주자가 흔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크 시대로 추측되는 그의 연주는 아름답지만 구슬펐다.
그의 표정도 그랬다.
좀 더 오래 듣고 싶었지만 오가는 사람도 없는 그곳에 혼자 계속 서있기가 어색하고 편치 않았다.
동전을 떨구고 발길을 돌리는 마음이 짠했다.
'지금쯤 부라노 섬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을 텐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
생각하며 천천히 페로비아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