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수태고지', 동방박사들의 경배'(1481, 우피치), '최후의 만찬'(밀라노)를 완성하면서 유명해집니다.
그는 줄곧 이탈리아에서 활동했지만 그 명성은 국경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팬 가운데 프랑스왕국의 프랑수아 1세도 있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특히 이탈리아 예술을 사랑했던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를 프랑스로 초빙합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이미 나이가 많아 활발하게 궁정화가직을 수행할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그럼에도 제안을 수락하고 1516년(63세) 때 로마에서 프랑스로 향합니다.
다빈치는 이때 아끼던 작품 몇 점을 들고 가는데, 그중 하나가 모나리자입니다.
그는 1503~1506년경 모나리자를 그렸고, 로마에 머물던 1516년 완성한 걸로 추정됩니다.
1519년 4월, 건강이 나빠지던 그는 유서를 남겼고 프랑스의 앙부아즈에서 5월 2일 숨을 거둡니다.
모나리자는 이후 프랑수아 1세를 통해 왕실 소장품이 된 것이에요.
그러므로 모나리자가 루브르에 걸려있게 된 것입니다.
루브르가 수많은 침략전쟁에서 얻어진 약탈 문화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모나리자는 그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16세기 전반 프랑스를 다스렸던 프랑수아 1세의 뛰어난 안목 덕입니다.
그 이전까지 대부분의 프랑스 왕들은 영토 확장 욕구에만 눈이 멀었을 뿐, 문화와 예술에 대한 안목이 별로 없었습니다.
불과 스무 살의 나이에 왕좌에 올랐던 이 젊은 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향했습니다. 밀라노를 필두로 이탈리아의 도시를 점령하는 동안 그곳의 뛰어난 건축과 예술 감각을 눈여겨보았습니다.
멋진 디자인은 그 자체로 말이 필요 없는 강력한 경쟁력입니다.
이탈리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곤한 프랑스의 문화자본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젊은 왕은 자존심이 상했지요.
그 결과 첫 번째 착수한 일이 S급 인재의 초빙,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프로젝트입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입지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0세는 피렌체 태생으로 메디치 가문 출신이기에 다빈치는 내심 로마의 큰 프로젝트를 기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친구인 브라만테 그리고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등 젊은 작가의 손에 이미 맡겨진 뒤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38세, 라파엘로는 불과 서른 살의 나이인데 반해 다빈치는 한 세대 위인 61세였습니다.
변화가 절실한 순간이었어요.
특히 천하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면 더 그렇습니다.
바로 그때 프랑수아 1세가 다빈치에게 손을 내민 것입니다.
이탈리아 반도를 따라 남진하는 프랑스 군대를 막기 위해 당시 교황 레오 10세가 1515년 볼로냐에서 프랑스 왕과 만나 협상하다가 다빈치를 천거하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다빈치를 접견한 뒤 그에게 푹 빠졌습니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폭넓은 지식과 최고의 예술 감각, 거기에 공학적인 기술과 안목까지 갖춘 만능천재였기 때문입니다.
젊은 왕은 만약 그가 자기의 궁전으로 온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왕은 다른 유명 예술가들과 다빈치를 비교하려 들지 않았지요.
젊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는 법을 알았던 리더였습니다.
그리하여 다빈치는 동년배들의 상당수가 이미 세상을 떠난 나이에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과 함께 당나귀에 가방을 싣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습니다.
그 가방 안에 저 유명한 ‘모나리자’가 들어있었습니다.
‘세례자 성요한’, ‘성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 도 그 가방 안에 함께 담겨 있었기에 그 그림들 역시 루브르에 걸려 있는 것이죠.
르네상스 시대 초특급 인재와 역사상 최고의 킬러 콘텐츠가 함께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입니다.
프랑스로서는 이보다 더 행운일 수 없고, 이탈리아로서는 두고두고 한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이제 천하를 얻었다.”
이 명작이 왜 그려졌는지, 또 누구를 위해 그렸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다빈치가 그림에서 일부러 모호하게 한 듯한 ‘스푸마토 기법’을 이용한 것처럼 안개와 같은 신비함만 남겨져 있을 뿐이지요.
다빈치는 젊은 왕의 든든한 스승이자 친구였습니다.
앙부아즈에 있던 왕궁과 다빈치의 거처 사이에 비밀 통로가 있어 왕은 그를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살았던 다빈치는 1519년 5월 2일 왕의 품에 안겨 편안히 숨을 거뒀다고 바사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프랑수아 1세는 다빈치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모나리자의 미소를 얻은 겁니다.
그가 프랑스 문예부흥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글출처 : [손관승의 리더의 여행가방] (3)>
그의 유해는 1874년에 앙부아 성의 생후베르 성당으로 옮겨졌습니다.
다시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례자 성요한’, ‘성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가 걸려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여전히 오직 모나리자를 향해 몰려가는 사람들은 이 두 그림에 관심이 없더군요.
세례자 성요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루브르>
어두운 검정을 배경으로 오른손 검지는 십자가를 향하고, 왼손은 십자가를 들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입니다. 이 인물을 세례자 요한으로 보는 이유는 그가 걸치고 있는 털옷과 십자가 때문이라는데요.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벌꿀을 먹고살면서 고행을 하였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한 선지자이자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준 인물로서, 그가 광야에서 살았다는 점에 근거하여 흔히 낙타 털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다고 합니다.
성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루브르>
중앙에 정면을 향해 앉아있는 여인이 마리아의 어머니인 성 안나, 그리고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인데요.
마리아는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있어요. 그리고 아기 양에게 발을 올려놓으려는 아기 예수를 떼어놓으려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희생양의 상징으로서, 마리아는 아들을 험난한 운명으로부터 막고 싶은 모정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안나와 마리아의 표정에서 어머니로서의 안타까움이 절절해 보이더군요.
루브르에서 다시 보고 싶은 그림들이 있었는데 파업으로 인해 오픈하지 못한전시관이 있어서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갑자기 폐소 공포증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팠습니다.
화려한 금빛천장만 봐도 멀미가 납니다.
오픈 시간이 늦어지면서 2시간쯤 기다린 데다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에서 에너지가 한 번에 빼앗긴 느낌이 들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