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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전나무
Dec 03. 2023
에르메스보다 마들렌 한 박스
8. Ritz Paris Le Comptoir
나 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 R이 있습니다.
'그 사람 참 진국이야' 하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죠.
그녀와 함께 여행을 한 것은 한 번 뿐이지만 유쾌한 입담과 배려심이 깊은 친구라 두고두고 기억이 납니다.
R은 해외에서 간간히 그림엽서를 보내주었고 몇 글자 안 되는 그 엽서를 받아 들 때마다 묘한 행복을 느끼곤 했습니다.
오늘 방문할 곳은 오픈 시간이 10시 30분이라 느긋하게 집을 나섰지요.
숙소 근처 메트로 역 앞에 있는 우체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엽서들을 한국으로 보내려고 하는데요.'
'5장 모두 한국으로 보내는 건가요?
'네'
R과 함께 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엽서를 보내려는 겁니다.
우편 요금이 적힌 작은 영수증 같은 걸 건네며 하나씩 붙이라고 하더군요.
전자 우편 시대이니 당연한 변화라고 이해했지만 우표가 아니라 조금은 아쉬웠습니다.
보통 5~6일이면 도착한다고 하더군요.
'친구들이 깜짝 놀라겠지?'
그냥 맘이 따뜻하고 흐뭇해졌습니다.
호텔 드 라 마린 앞에 도착하니 9시 30분
한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근처에 있는 디저트 상점으로 향했습니다.
마들렌을 한 상자 사고 싶었거든요.
성모승천의 교회 앞에 중세적이면서 현대적인 석고 조각이 놓여 있었습니다.
QR코드를 찍어보니 Rero라는 작가가 설치한 작품이더군요.
Rero의 작품
프랑스 페이스트리 전문가인 프랑수아 페레가 운영하는 리츠 파리 르 콤투아르(Ritz Paris Le Comptoir)는 생각보다 아주 작았습니다.
동화 속 과자 궁전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디저트 케이크들이 진열대 안에 가지런합니다.
테이블은 단 4개인데 운 좋게 하나가 비었더군요.
마들렌 한 상자를 구입하고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천장의 조명마저도 달달 폭신한 빵 같이 노랗고 동그란 모양입니다.
한 달 동안 파리에서 마신 커피 중 단연 최고였습니다.
선물용 레시피 책, 에이프런 등 굿즈
디저트 용 케이크
마들렌
화장실 위치를 물어보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서 왼쪽에 붙어있는 건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왼쪽 건물의 문을 여는데 뭔가 범상치 않아요,
빨간 카펫이 깔려있는 계단 위쪽에는 샹들리에가 걸려있더군요.
직감적으로 알았지요.
'리츠 호텔이구나'
그러니까 방돔 광장에 위치한 리츠 호텔의 뒷문이었던 겁니다.
컨시어지가 무엇을 도와줄까 묻더군요.
화장실을 찾고 있다고 하니 지하층으로 내려가라고 친절히 알려주었습니다.
내가 내려가는 동안 계단 카펫을 청소하던 직원이 하던 일을 멈추어서 민망할 정도였지요.
세면대 수전의 모양이 백조이고 싱크볼은 300년 독일 식기의 명가 빌레로이 앤 보흐였습니다.
호텔 화장실을 잠깐 들렀을 뿐인데 그야말로 황홀하더군요.
리츠 화장실
샤넬이 34년 동안 살았던 바로 그 호텔입니다.
스위트 룸은 어떨지 상상이 안되더군요.
과연 그곳은 얼마나 할까 궁금하여 홈피를 찾아보았습니다.
코코 샤넬 스위트는 1박에 6600~8200유로, 한화로 930만~1160만 원입니다.
샤넬 제품이 비싼 이유가 있구나 싶었습니다.
호텔 로비 한쪽에 헤밍웨이 바가 보였습니다.
쿠바 아바나에도 헤밍웨이가 즐겨 다니던 술집이 두 곳이나 있는데 파리는 그곳이더군요.
객실은 몰라도 바는 한 번 들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습니다.
리츠 호텔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나치의 본부로 사용되었는데요.
당시 종군기자였던 헤밍웨이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군인들을 대동했고
1944년 나치로부터 해방된 후부터 헤밍웨이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누군가 그곳은 회원 전용이라고 하여 포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잘못된 정보였습니다.
오래된 가죽향기가 나는 안락의자에 앉아
거친
엘피에서
흘러나오는
샹송을
들으며 코냑을 마시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날이 있으리라 믿어보네요.
그곳은 헤밍웨이뿐만 아니라 스콧 피츠제럴드 등 많은 파리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이 단골로 찾았고
마르
셀 프루스트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그곳의 맥주를 찾았답니다.
리츠 호텔의 헤밍웨이 바
백팩을
가지러
콤투와로 돌아왔는데 그새 사람들이 많아졌네요.
소중한 마들렌 상자를 챙겨서 그곳을 나왔습니다.
마음까지 달달해지는 아침입니다.
아기곰 모양의 초콜릿 케이크
리츠 호텔 뒷문에서 튈르리 쪽으로 향하는 길은 그 유명한 포부르 생토노레에서 깜봉 거리로 이어지는 명품
거리입
니다.
샤넬 본사는 물론이고 에르메스, 디올 등이 주르르 늘어서 있는데 조금 있으면 오픈런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늘어서겠구나 싶습니다.
물론 파리 곳곳에 여러 곳의 매장이 있지만 그곳이 가장 대표적인 곳이라더군요.
매장 방문을 하는 것조차 미리 인터넷에 신청을 하고 추첨을 해서 선정되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고도의 판매 전략도 포함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개점 전 샤넬 본사
에르메스 본사
에르메스 쇼윈도우
에르메스가방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코 켈리백(Kelly Bag)과 버킨백(Birkin Bag)입니다.
켈리백은 배우이자 모나코 왕비였던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의 이름이 붙여진 가방인데요.
1852년에 출시되었을 당시 그 가방의 이름은 ‘삭 아 데페슈(Sac à Dépches)’였답니다.
가방이 출시되고 약 100
년 후 그레이스 켈리가 그 가방으로 임신한 배를 가리고 서 있는 사진이 유명잡지 라이프에 실리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방의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그녀의 이름을 따서 켈리백, 켈리백 하기 시작하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20년이 지나도록 켈리백으로 불리자 에르메스 본사에서는 그 가방의 이름을 에르메스 켈리백(Hermes Kelly Bag)으로 바꾸겠다고 공식 발표하게 됩니다.
그레이스 켈리가 들고 있는 켈리백 (사진 출처 구글)
버킨백
역시 스토리가 있습니다.
1983년, 제인 버킨(영국의 가수이자 배우,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은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운 좋게 무료 업그레이드를 받아 퍼스트 클래스에 앉게 되었지요.
그리고 우연찮게 그녀의 옆 좌석에 당시 에르메스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CEO였던 장 루이 뒤마가 앉았습니다.
그녀가 가방을 수하물 칸에 올리다가 실수로 가방을 떨어트리고 갖가지 소지품들이 쏟아져 내렸어요.
당시 그녀의 시그니처백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라탄 가방이었습니다.
버킨은 맘에 드는 크고 튼튼한 가방을 찾기가 어렵다, 에르메스가 바쁜 엄마들이 이것저것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는 편리한 가방을
만든다
면 자신의 시그니처백인 라탄백을 포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제인 버킨(시그니처백 란타백)과 세르주 갱스부르 (사진 출처 구글)
제인 버킨 (사진 출처 구글)
뒤마는 그녀의 가방에서 쏟아져버린 소지품 줍는 걸 도와준 후 비행기 멀미용 봉투에 버킨의 제안을 참고하여 가방의 디자인 초안을 스케치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인 1984년, 버킨은 새로 출시된 40cm 크기의 백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백의 이름은 출시부터 버킨 백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켈리백과 버킨백은 많은 여성들의 로망이 되어 지금까지 최고의 백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이죠.
2011년 일본이 지진 피해를 입었을 때 버킨은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낡고 오래된 가방을 경매에 내놓았습니다.
그녀의 첫 버킨백은 162,000달러(약 2억 1천만 원)가 넘는 가격에 판매되어 기부했다고 하네요.
스티커로 멋을 낸 제인 버킨의 버킨 백(사진 출처 구글)
제인 버킨은 2023년 7월 16일 파리의 자택에서 사망했습니다.(76세)
생 로슈 성당에서 두 딸과 마크롱 여사, 수많은 팬들의 슬픔 속에
장례가
치러졌습니다.
그녀는 패션의 아이콘으로, 버킨의 여인으로 불렸지만 그녀가 생전에 갖고 있던 버킨 백은 다섯 개 정도였으며 그마저 경매에 부쳐 얻은 수익금으로 기부 활동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제인 버킨의 딸인 프랑스계 영국 여배우 루 드와용(오른쪽)과 프랑스계 영국 여배우 샤를로트 갱스부르(왼쪽)
장례식에 참석한 마크롱 여사
에르메스의 켈리와 버킨백은 돈이 있어도 구매하기 어려운 것으로 유명한데요.
갖고 싶은 백을 리스트에 대기자 명단으로 올리려면 일정 기간 동안 에르메스의 구매 실적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우수 고객으로 선정되어야만 리스트에 오르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은총을 받듯 받을 수 있는 거죠.
가격도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데 가방에 달고 다니는 작은 참 하나가 100~200만 원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먼 나라 이야기입니다.
에르메스 켈리백 약 4300만 원(사진 캡처 네이버)
버킨백 약 3700만 원(사진 캡처 네이버)
에르메스 버디 참 약 200만 원(사진 캡처 네이버)
다이아몬드 히말라야 버킨이라는 이름의 백은 다이아몬드가
붙
어 있거나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다이아몬드 히말라야는 경매에서 팔린 핸드백 중 가장 비싼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흰색과 회색의 그러데이션으로 염색된 닐로티쿠스 악어가죽으로 만들어졌는데요.
2022년, 소더비는 다이아몬드 히말라야 버킨 30을 45만 달러(5억 8천만 원)에 팔았습니다.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느낌입니다.
명품 중의 명품은 사람이 아닐까요?
내가 명품이다 생각하면 쉽습니다.
모퉁이에 서점 스미스 앤 손(smith & son)이 있기에 들어갔지요.
서점이 보이면 그냥 습관적으로 들어가 봅니다.
예약해야 하는 명품샵이 아니니 한 바퀴 쓱 둘러보고 나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지요.
4유로짜리 에코백을 샀어요.
행복합니다.
내겐 얇은 면으로 만든 서점의 에코백이 명품이고 마들렌 한
상자까지
있으니 마음까지 달달합니다.
이른 아침 한 시간의 여유가 만든 행복이었습니다.
호텔 드 마린으로 들어서니 몇몇 사람이 오픈을 기다리고 있더군요.
이제 30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해볼까 합니다.
에코백과 마들렌 한 상자
Horel de la ma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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