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지금 퇴근하는 길인데 마침 저녁을 못 먹었다. 밥 친구 좀 해줄래?”
용은 여전했다. 마치 결혼 전, 대학 동기였을 때처럼 천진한 소년 같은 말투가― 현은 하마터면 그와 자신이 이혼한 사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을 뻔했다.
“내가 왜?! 그리고 나 배 안 고파.”
“고픈 것 같은데?”
인체란 참 정직했다. 끼니를 거르고 오그라든 현의 위는 밤이 되어 더욱 조용해진 시영 타워의 복도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꼬르륵대며 요동치고 있었다. 현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거짓말하지 말고 얼른 내려와. 정직한 게 덜 구차해.”
구차하다, 현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바로 이 단어 때문에 오늘 저녁 식사는 결국 둘이 마주 앉게 되고 말았다. 얼마 만인가.
그들은 시영 타워 건너편의 콩나물국밥집으로 갔다. 파전도 함께 하는― 여기에 동동주만 시키면 데이트할 때 늘 먹던 메뉴였을 테지만 오늘 술은 사양이었다. 현과 용은 더 이상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국밥이 나오길 기다리며 둘 사이에는 정적만 흘렀다. 현은 고개를 숙인 채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뭐해?”
보다 못한 용이 물었다.
“…일 생각.”
현이 대답했다.
“너는 어머니랑 요즘 어떻게 지내?”
젓가락을 탁 내려놓더니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현이 용의 눈을 바라보며 어머니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 현의 모습이 용은 제법 반가웠다.
“우리 엄마야 내놓은 자식 방치하는 거 알잖아. 아빠랑 지금 미국에 계셔.”
그리고 뜨끈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밥이 한 그릇씩 각자 앞에 배달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숟가락만 뜨던 중이었다. 현이 다시 용에게 물었다.
“너도 어릴 때 어머니가 사진 매일 찍어주셨어?”
“음, 글쎄. 많이 찍어주시긴 했는데 매일까진 모르겠다. 요즘처럼 폰카가 좋은 시절은 아니었잖아.”
“그런가? 그럼, 카메라로라도. 혹시 방에 CCTV는 있었어?”
용은 숟가락을 식탁에 탁, 내려놓았다. 줄곧 미소 띠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너 지금까지 우리집을 그렇게 생각했어?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야?”
“아, 불쾌했다면 미안해. 그런 의도 아니었어. 난 그냥 평범한 모자 관계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어.”
“뭐가 평범한 모자 관계야. 이상한 질문만 캐묻고. 너 이혼 전에도 이런 거 물어본 적 없잖아.”
“아, 우리 문제랑은 정말 상관없어. 그냥 일 때문에 물어본 거였어. 정말 미안해.”
현은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둘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파전 나왔습니다―”
*
노곤했던 몸이 축 늘어졌다. 알딸딸한 이 기분, 술의 힘이란 역시 대단했다. 구겨진 휴지 조각 같던 잡념 따위는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우울한 기분조차 나른하게 만드는 마법.
“그만 마셔, 취해.”
용은 현에게서 동동주 사발을 빼앗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현은 몸을 돌려 그것을 벌컥 마셔버렸다.
“부모에게 자식이란 뭘까… 그 애의 하루,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보고 싶고… 모든 순간을 남기고 싶고… 죽으면 살아 돌아왔으면 싶고… 그런 걸까?”
현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떠들어댔다. 용은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나라고 알겠어? 우리에겐… 아이가 없었잖아.”
“참 그랬지. 아이가 없었네, 우리는. 맞아.”
현은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손뼉을 쳤다. 용은 그 모습이 너무나 서글펐다.
*
둘의 결혼 생활은 고작 3년이었다. 지거국 공대 동기로 만나 캠퍼스 커플로 지내고, 취업 후 장거리 연애를 하다가 결혼하기까지 그 긴 세월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짧은 시간. 이처럼 오랜 만남을 갖는 남녀를 두고 여느 사람들이 말하듯, 그들은 지인들에게 소위 ‘이상적인 커플’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대기업 호남 지사에 어렵사리 입사한 현이 용과의 물리적 거리가 주는 외로움에 지쳐 용이 근무하는 동탄으로 올라와 작은 무역 회사 경리로 이직했을 때도 사람들은 잘 선택했다고 입을 모았다. 어차피 너희들은 결혼할 사이니까― 그런데 그런 둘의 결혼이 고작 3년 만에 깨지다니.
변호사에게도 쉽게 꺼내기 어려웠던 이야기지만, 현은 결혼 생활 중 단 한 번도 부부 관계에 응하지 않았다. 연애 기간에는 그저 개인의 신념일 뿐이라 여겼고, 둘 다 첫사랑이었기에 서로를 소중히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해서도 거절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용은 대화도 시도하고 부부 상담도 권해 보았다. 그러나 현으로부터 모두 거절당했다.
용은 진심으로 아이를 갖고 싶었다. 둘은 이 문제로도 미친 듯이 싸웠다.
“우리끼리 행복해지려고 한 결혼 아니었어?”
현은 아이조차 원치 않았다. 생각해 보면 둘은 자녀 계획도 그동안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둘은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었던 걸까―
매일 울고 싸우고… 감정이 남아있는 만큼 서로 사랑한단 사실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결코 좁힐 수 없는 간극도 존재했다.
먼저 이혼을 요구한 사람은 현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