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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한집사 Oct 29. 2024

시계 처음 봤나요?

 “아— 미안, 미안. 놀리려던 건 아닌데.”     


 꽥 소리를 지르는 다영에게 건네는 사과와 함께 머리가 곱슬곱슬한 여자아이가 도색이 거의 벗겨져 가는 아파트의 외벽을 뚫고 튀어나왔다. 나풀거리는 레이스 원피스에 투명한 유리 구두를 신은 그 아이는 다영이 늘 꿈꾸던 공주님 같은 외모였지만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너야? 아까 그 목소리.”

 다영은 분명히 놀란 토끼 눈이었지만 화가 나서 입은 툭 튀어나온 채로, 여자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자아이는 그런 다영의 모순된 얼굴이 낯설지 않은 듯했다.

 “응, 나야.”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여자아이는 공중을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며 다영이 처음 보는 신기한 생물인 양 이쪽저쪽 살펴보았다. 다영 역시 여자아이를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다영의 허리 정도쯤 올 법한 키의 그 애는 눈망울이 크고 코가 오뚝한 것이, 뭐, 외적으로는 꽤 사랑스러웠다.

     

 “왠지 네가 필사적으로 대답하는 게 살고 싶어 보였어.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바뀐다는 사실이 너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웃었지. 넌 안 그래?”

 “…하나도 재미없어.”

 정말 하나도 재밌지 않았다. 그리고 다영은 이제 죽기 싫었다. 현재 소원이라면 부디 자신이 12층과 11층의 1/3 지점에 떠 있는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제 와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다영에게는 고소 공포증이 있는 게 확실했다.

 “표정은 왜 그렇게 울상인 거야?”

 “그럼, 지금 웃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해? 저기 꼬마야. 제발 나를 땅으로 안전히, 조심스레, 무사히 내려주지 않으련?”

 아무래도 저 여자애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이 상황도 현실이 아니야, 모든 게 다 뒤죽박죽이야— 라고 울부짖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다영은 썩어 들어가는 표정이긴 했지만, 자신의 현재 심정을 간절히 상대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생글생글 웃는 표정은 다영을 더 열받게 했다.     


 “내가 널 곱게 땅을 밟게 해 준다면, 넌 나에게 뭘 해줄 건데?”     


 하, 어린 게…     


 “아아, 아무거나, 네가 원하는 것 전부. 됐지?”     


 말이 끝나고 정확히 10초 뒤— 다영의 몸은 미친 듯한 속도로 바닥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었지,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고.

“야! 사람을 죽일 거야? 내가 다 해준다고 했잖아!”

 다영이 비명을 질렀지만 1층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다영의 코앞에 화단의 잔디가 닿기 약 0.00000001mm 전, 간신히 위험천만한 낙하 운동이 멈추었다. 그리고 3초간 그대로 정지해 있다가 다영의 몸은 풀썩 화단에 내려앉았다.

“이 미친 계집애… 죽을 뻔했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다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에는 조금 전의 여자아이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다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 너 정체가 대체 뭐야?!”

 “나…? 난 네 시계야.”

 “시계…?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기막혀하는 다영의 반응에도 여자아이는 태연했다. 오히려 입으로 똑딱—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흉내 내며 빙글빙글 다영 주위를 돌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날뛰던 여자아이는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은 후에야 비로소 입을 뗐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 자신만의 시계를 갖게 돼. 덕분에 천상계에 있던 우리도 지상에 내려와서 인간이 자가 호흡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초침을 돌리기 시작하지. 시계는 인간의 생을 먹고 움직여. 어떨 때는 빠르게, 어떨 때는 느리게, 어떨 때는 시간을 뒤바꾸기도, 멈추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다가 인간이 삶을 끝내는 순간이 오면 시계도 멈추고… 우린 뭐, 다시 천상계로 돌아가는 거지. 그렇다는 이야기야.”

 “후,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그럴듯한 헛소리였다. 죽다 간신히 살아난 지금, 코딱지만 한 여자아이에게 그리스·로마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나 듣고 있다니……. 진짜 오늘 하루 왜 이러니, 나.

 “이봐, 주다영. 그럼, 지금 이 상황은 말이 되는 거고?!”

 다영은 여자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네킹처럼 멈춰 선 거리의 사람들, 엿가락처럼 휘어진 놀이터의 그네, 방향을 꺾다가 영영 기울어진 오토바이, 그리고 머리 위에서 노래를 멈춘 매미까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거 귀신에 홀린 건 아닐까?

 “귀신 아니야.”

 마치 다영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아이는 또박또박 말했다.

 “으악! 너 너 너… 뭐야? 진짜 귀신이야?”

 “하… 아까 말했잖아, 시계라고. 시! 계! 인간들은 꼭 이렇게 여러 번 설명하게 한다니까.”

 혀를 끌끌 차며 여자아이는 얼빠진 다영을 붙잡고 다시 한번 자신의 정체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사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을 더 설명한 끝에 비로소 다영은 여자아이의 정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렇다,

 시계다!     


 “좋아! 그럼, 시계 넌 뭘 원하는데?”

 “이제야 말이 통하네. 난 별거 없어. 내 시침과 분침을 움직일 수 있는 네 삶, 그거면 충분해. 그러니까 이제 넌 나를 위해서라도 다시 살아줘야겠어.”     

 다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시 오늘과 같은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더 이상 죽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고 싶지도 않았다.

 “역시 인간들은 바보 같아.”

 시계는 가늘게 눈을 뜨고 다영이 한심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내가 너를 진짜 마지막으로 도와줄게. 시간을 아주 조금 되돌릴 수 있도록— 그럼 적어도 오늘보다는 나은 삶이겠지.”

 유독 ‘아주’와 ‘조금’에 힘을 주어 말한 시계는 말을 마치자마자 ‘휘잇!’ 하고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순간 신데렐라를 부르는 열두 시의 종이 울린 것처럼 멈추어 있던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일이었다. 웅크려있던 열기를 비집고 나온 희미한 바람의 숨결까지 느껴졌다. 바야흐로 생동하는 여름밤.

 “우와…….”

 감탄하는 다영을 보며 시계는 다시 쿡쿡 웃었다. 그러더니 건물 그림자에 가려진 아파트 벽으로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다영은 그만 말을 잃었다. 한참을 무언가 깊이 생각하던 다영은 몸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었다. 앞뒤, 양옆 구석구석, 마지막으로 손바닥까지 싹싹 털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모조리 털어내고 있을 때였다.     

 

 지이이잉—     


 반바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다영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받았다. 엄마였다.

 “야, 이놈의 가시나야! 뭐 한다고 아직도 안 들어와? 야밤에 빨리빨리 들어와!”

 “아, 엄마. 금방 갈게요!”

 다영은 후다닥 옥상 문을 열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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