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간에서 뒤꿈치가 떨어지던 순간, 중력에 사로잡힌 다영의 정수리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곧 정신을 잃었다. 마치 수면 마취를 할 때면 숫자 ‘1, 2, 3…’을 세다가 어느새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것처럼.
그리고 다시 의식을 되찾았을 때— 슬프게도 다영은 여전히 추락 중이었다. 어쩜 시간이 이처럼 개미 더듬이만큼 흐를 수 있는지! 저기 보이는 바닥에 부딪혀 뼈와 살이 인수 분해되는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떨어지고 있는 다영에게 1층, 또 1층만큼 다가오는 두려움이었다.
‘남들은 뛰어내리면 다 죽은 후 깨어나서 저승사자나 만나던데, 나는 왜 이리 운도 지지리 없어서 아직도 이 모양인 거야!’
다영은 비명을 질렀다, 부디 이 모든 일들이 빨리 끝나길 바라며. 하지만 다영의 끝은 1초, 또 1초… 더디게만 다가왔다.
그때였다.
정확히 다영의 몸이 12층과 11층의 1/3 지점을 지나던 순간—
갑자기 정지했다, 모든 것의 움직임이.
화단의 나뭇잎은 옅은 바람결에 흔들림을 멈추었다. 단지 안을 걷는 사람들도 한 다리를 들어 올린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참 낙하하던 자신 역시 허공에 그저 붕 뜬 상태로 고정돼 버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다영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간신히 눈동자만 아래로 갸웃해 보니 11층 거실 바닥에 갈색 말티푸 한 마리가 배를 까고 벌러덩 드러누운 모습이 인형처럼 비칠 뿐이었다.
‘이거 지금 뭔 상황이지?’
다영은 분노가 치밀었다. 학교에서야 공노비 처지였으니 어쩔 수 없이 성질 죽여가며 살아야 하는 1인이었으나, 아니— 내가 지금 거지발싸개 같은 이승 탈출하겠다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했는데 꿈에서고 저승에서고 요 꼬락서니로 있으라는 건……. 정말이지 자신을 공중에 묶어놓은 놈의 싸다구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나 지금 이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눈깜박임뿐.
“히히, 너… 죽고 싶어?”
그때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 동굴 안에서나 들을 수 있을 법한 깊은 울림.
“으…니(아니)….”
입술이 잘 움직이지 않는 관계로 부정확한 발음이긴 하나, 다영은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그럼, 왜 뛰어내린 거야?”
멕이는 게 아니었다. 진정 호기심이 가득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당연한 것을 왜 묻는지?! 그때는 맞고 지금은 아닌 거지.
“주…ㅎ흐…ㄱ…꼬…시…ㅍ…스(죽고 싶어서)….”
대답이 길어질수록 입술을 움직이기 힘들었다. 다영은 혼신의 힘을 그러모아 말했다. 그땐 그랬노라고.
“아, 뭔 소리야?!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목소리는 약간 짜증이 난 듯했다. 다영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이…ㅂ…안…ㅎ우…ㅁ…즈…ㄱ…으(입 안 움직여)….”
“어?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이어지자,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욱 크고 격정적으로 바뀌었다.
이대로는 아니 된다.
위기에 봉착한 다영은 결국 멀쩡한 대답을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짧고 굵게 가자— 결심한 다영은 딱 한 글자에 온 힘을 모으기로 마음먹었다.
“이…ㅂ…입(입, 입)!”
ㅇ-ㅣ-ㅂ.
공기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이 조화로운 소리 한 음을 위해 다영은 발가락 끝에서부터 힘을 끌어모아 입술에서 팡, 터뜨렸다.
“입?! 입이 안 움직인다고?”
“으으…으으음!!! 음음!!! ㅇㅇㅇ…음음음!!!”
드디어 자기 뜻을 이해한 목소리에 다영은 미친 듯 화답했다. 헬렌 켈러가 처음으로 ‘물’을 말했을 때 설리번 선생님의 감격이 이러했을까.
“아, 내가 그걸 잊고 있었네. 미안. 입은 움직이게 해 줄게.”
그제야 피가 돌지 않는 듯하던 입술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입술을 몇 번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한 다영은 비로소 깊은숨을 내쉬었다.
“하… 미치는 줄 알았네.”
“큭큭큭큭… 크크크큭큭큭큭큭…….”
사방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짐작건대 목소리의 주인은 어린 여자아이였다. 그는 지금 다영이 처한 상황이 꽤 재미있어 보였다. 내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고 있는 처지에 비웃음까지 사다니, 다영은 화가 치밀었다.
“야! 너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