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적인 머피의 법칙

왜 나만

by 심바
큰맘 먹고 세차하면 비 오고
소풍 가면 소나기
급하게 탄 버스 방향 틀리고
건널목에 가면 항상 내 앞에서 빨간불
< 케로로 행진곡 >

머피의 법칙이다. 왜 나만? 왜 하필 지금? 이런 생각이 들면서 괜히 심통이 난다. '돈 싫어 명예 싫어...'를 소심하게 흥얼거리게 된다.(같이 흥얼거리셨다면 적어도 저와 같은 시대의 공기 온도 습도를 느끼셨겠군요) 평소에 딱히 잘못하고 산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런 일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일까. 기분 탓이라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절묘하다.





지난 25일, 한 달도 전에 동대구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친구로부터 그곳에 사는 공부친구를 보러 가기로 했다며 동행을 제안받았다. 평일인지라 아이들 하교시간 때문에 정말 빠듯하게 왕복기차표를 예매했다.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6시간 정도. 하지만 너무 신나 어깨춤이 절로 났다. 야간자율학습시간에 친구와 몰래 빠져나와 놀러 나가는 짜릿한 기분이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친구와의 만남을 손꼽아 기다렸다.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비몽사몽 서울역으로 출발했다. 부지런한 친구는 이미 역에 도착해 있다. 이 아침에 얼마나 서둘렀을까. 나처럼 마음이 달뜬 얼굴을 하고 반겨준다. '아이 신나라!' 하는 외침을 주고받으며 16호차를 찾아 바삐 걸었다. 평일 아침인데 KTX를 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단 말인가, 새삼 놀라며 꽉 찬 객실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이 기차는 우리를 곧 동대구역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뚱바와 에이스. 환상적인 조합이다. 부지런한 친구는 애피타이저를 잊지 않았다. 공복에 커피를 마시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세심한 배려라니. 우리는 감사한 이 시간을 밀린 근황과 삭인 감정들을 공유하는데 아껴 썼다. 5분 정도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나있었는지 이내 동대구역에 도착했다는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멀어서 만나기 힘들다고 하는 건 다 거짓부렁이었던게지. 이렇게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몇 년 만의 만남 앞에 다다랐다. 이 반가움을 어떻게 표현할까 마음이 들떠 발도 같이 둥둥 뜬다.

어떻게 찾아야 하지 고민하던 찰나 우리를 찾아낸 친구가 바로 앞에 있다. 보자마자 와락 껴안은 우리들. 너무 오랜만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우리는 진하게 포옹을 하고 등을 쓰다듬으며 그동안 잘 지냈냐고 안부를 바삐 물었다. 보고 싶은 얼굴을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가워 눈물이 찔끔 났다.






'서울사람들은 꼭 대구 오면 아침부터 막창을 구워.' 하며, 친구는 우리를 간판부터 맛있어 보이는 막창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11시 오픈시간에 맞춰 가게를 박차고 들어가 맥주를 꺼내온 우리들. 저희에게 허락된 시간이 길지가 않아서요... 남의 눈치를 볼 시간조차도 없었다. 나눌 이야기가 너무 많았고, 들어야 할 이야기도 너무 많았다. 연말까지 공부에 매진한다던 다른 친구는 이날 놀라게 하며 나타나 무려 수능시험을 치렀다고 했다. 대견해서 눈물이 다 나... 역시 친구들은 여전히 멋지게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멀리 걸어가는 시간도 아까워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세상에 여기 이렇게 예쁜 곳이 있었냐며 대구 토박이 친구도 놀라워했다. 아마 무엇이 있었더라도 다 좋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둘째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가 오면 안 되는 시간에 전화가 왔다. 갑자기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응, 무슨 일 있어?"

"엄마아..... 저 열나는데에... 집에 가도 되요오...?"

목이 쉴 대로 쉰 전화 너머의 아이. 반에 독감으로 학교에 나오지 못한 아이가 6명이나 된다고 했었는데 당첨이구나... 올해 한 번도 학교를 조퇴한 적이 없었던 아이는 내가 동대구에 온 오늘 지금 이 시간에 집에 와야 한다고 했다. 어쩜 이래... 아픈 아이를 탓할 수 없다. 그냥 그게 너무 우연치고는 타이밍이 참으로 절묘해서 헛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럼 그럼, 어서 집에 와. 근데 엄마가 지금 좀 멀리 나와있어서 죽 주문해 줄 테니까 먹고 좀 쉬고 있어."

아이는 그러겠노라고 했고 열이 펄펄 끓는 몸을 이끌고 그렇게 조퇴를 했다. 초등 고학년이 되고 나니 아파서 소아과에 가는 것도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힘들어서 병원에도 못 가겠다는 아이는 오늘 이렇게 아팠다.






왜 내가 약속이 있으면 아이는 열이 나거나 콧물이 나거나 기침을 하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아픈 것일까. 지금은 아이들이 좀 자라서 그 빈도가 덜해졌지만, 어렸을 땐 이런 이유들로 어렵게 잡은 내 약속들은 너무 쉽게 취소되고는 했다. 아픈 아이를 두고 나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왜 하필 오늘이어야만 하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드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이 마치 엄마가 놀러 나가는 달뜬 기분을 피부로 알아채는 것만 같은 건 그냥 느낌인 거겠지.



나의 약속은 남편의 약속에 비하면 반에반에반도 안되는데.

억울해.

머피의 법칙은 왜 나한테만 있는 거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