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020년에 방영된 프로그램이었다. Mnet에서 만들었고, 네 명의 여자 아이돌들이 모여 달리기를 하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시절, 사람들이 모여 마스크를 벗고 있으면 '방역절차를 준수하여...' 하는 자막이 꼭 달리던 그때의 방송을 보니 마치 십 년도 더 된 과거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자연 작가의 < 어제 그거 봤어? >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이 프로그램은 '달리기'라는 주제만으로 꼭 보아야 할 리스트에 즉시 추가되었다. 그리고 어제 러닝머신을 타면서 4개의 에피소드 모두 정주행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몇 년간 달리기를 해오면서 내가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달리기를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서 달릴 때는 생각을 비우는데 집중한다. 머리 아픈 일이 있거나 마음이 지칠 때에는 일부러 나가 달리기도 하니까.
크루에 나가 달릴 때는 자세를 교정하거나 기록을 단축하는데 모든 신경이 집중된다. 달리기에 가장 적합한 몸상태를 만들고, 러닝팁을 공유하며, 클래스를 듣기도 한다. 잘 달리는 사람이 선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달릴 때의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며 살고 있는 친구들과 달릴 때 우리는 인생을 조망하면서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이야기가 그곳으로 흘러간다. 빨리 뛰거나 느리게 뛰거나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달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지금 모일 수 있는 시간이 귀하다는 것을 아는 우리들.
그런데 < 달리는 사이 >에서 반짝반짝 예쁜 모습을 하고 달리는 20대 초중반의 저 아이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우리들의 그것과 너무 비슷한 게 아닌가.
달리기가 삶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던 것 같아. 숨이 찰 때 속도를 낮춰도 된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 하니 -
다음 길을 가서야 그 길을 알 수 있더라고요. 가서 보면 되잖아, 아무 생각하지 말자. - 유아 -
이제까지는 게을러 보이지 않기 위해서 뛰었는데, 누군가의 호흡을 맞춰주기 위해서 같이 달리는 건 진짜 처음이었어요. - 청하 -
너무 행복해요 이렇게 한 번 달려보고 싶었어요. 진짜 걱정 하나 없이 달렸다. - 츄 -
어떻게든 살아내자고 말하고 싶어. 우리 모두 꿋꿋이 살아내자. - 선미 -
보통의 아이들보다 몇 년 혹은 십 년 이상을 빨리 어른의 세계로 들어와 버려서일까. 일반인이 겪는 사회생활과 조금은 다른, 타인의 관심 속에서 끊임없는 경쟁을 하는 삶을 당연하다는 듯 살고 있어서일까. 20대의 눈부신 그 아이들은 40대인 우리들이 나누는 이야기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저 어린 친구들이 인생을 뭘 안다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삶은 저마다의 무거움을 동등하게 나누어 준다고 생각한다. 어리다고 해서, 미혼이라고 해서, 아이가 하나라고 해서, 부자라고 해서, 유명하다고 해서 그 삶의 버거움이 타인의 그것에 비해 절대 가벼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린 아이돌들의 이야기가 심장에 와닿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감정인지 오롯이 이해가 되는.
함께 달리고 나면 결국엔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그래서 너무 좋아하는 친구가 이제껏 한 번도 달려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는 꼭 같이 달려보자고 한다. 내가 뛰면서 느낀 이토록 감사하고 벅찬 기분을, 그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서.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지. 사는 것도 이런 거잖아.'
'딱 내가 연습한 만큼만 달려지는 게 참 신기하지. 역시 세상엔 공짜가 없어.'
'멈출 땐 100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막상 멈추고 나면 너무 아쉬워.'
'페이서가 나를 끌어주면 뛰는 게 훨씬 수월해. 인생의 페이서를 만나고 싶다.'
'이렇게 오늘 우리 모여서 뛸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마다의 고민을 가지고 만나 함께 달리는 그녀들을 보면서 참 많이도 울었다. 여유로울 때 무얼 하는지 묻는 질문에 한 번도 여유로워도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대답할 말이 없다는 말에. 경계선 인격장애를 진단받았던 그때가 내가 쉬었어야 할 때라며 우는 멤버를 그저 마음으로 느끼고 같이 울어주는 모습에. 마지막 장거리 달리기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어내고 나서 펑하고 눈물이 터져버리는 순간에. 내가 느낀 행복과 기쁨을 누군가 느끼는 걸 보고 싶다는 선량한 따뜻함에.
누군가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뭉클했고, 그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 아이들이 지금도 계속 달리는 삶을, 그 귀한 시간을 계속 누리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