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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6] 피땀 말고 달리기

by 심바

작년부터 올봄까지는 날이 좋았던 모든 하루들에 마라톤 대회 일정이 있었다. 대회가 주는 건강한 긴장과 떨림, 평소의 내 실력보다 아주 조금의 실력 점프를 기대하는 두근거림이 대회가 가진 매력이다. 10km와 하프 대회를 달려가며 개인기록을 1초라도 갱신하는 재미가 상당했다. 그렇게 대회에 중독 아닌 중독이 되어가던 중, 욕심껏 달린 10km 대회에서 첫 마라톤보다 못한 기록을 받은 후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 내가 대회를 나갈 실력이긴 한 거야?'


앞만 보고 경주마처럼 달리다 멈춰 서니 현실을 자각하게 된 나. 그럴만한 실력도 안되면서 대회 접수에만 매몰되어 있던 시간들이 꽤나 길었더랬다. 달리기에서 중요한 건 대회가 아니라 실력이거늘.

그렇게 대회 대신 연습에 몰두하자고 마음먹었지만, 역시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 후로 꽤 오랜 시간 달리기에 소홀해졌다, 몸도 마음도.

선수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달리고자 하는 나의 의지이다. 그 의지가 꺾여버린 것. 나는 달릴수록 느려졌다. 그런 내 스스로에게 실망하면서 달리기를 마음속 구석 안 보이는 곳에 숨겨버렸다.



'대체 어떻게 32km를 5 40 페이스로 3시간 안에 뛴 거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나의 상태는 내 기준으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기록을 당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독이 된 것.

내 마음 하나 스스로 달래지도 못하면서 내 다리를 컨트롤하겠다는 욕심뿐인 의지만 남은 요즘이었다.





무거운 다리로 가끔 러닝머신을 달리던 10월 어느 날, 인스타그램을 보다 한 기부마라톤의 추가모집 피드를 보았다. 5km와 10km 두 가지 코스로 여의도를 달리는, 대회라기보다는 행사에 가까운 마라톤. 추가모집이어서 그런지 남아있는 셔츠는 110 사이즈 단 하나, 홀린 듯 신청했다.


2025 FIT땀런


저렴한 참가비는 참가하면 환불되어 주최 측에서 위기 영아와 임산부를 위해 전액 기부한다고 했다.

큰 대회는 아니지만 지금의 내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달려보자 마음먹었고 언제나처럼 그날이 왔다.



대오버사이즈의 티셔츠는 질끈 뒤로 묶은 후 배정된 그룹줄에 섰다. 대회를 나간다는 떨림보다는 과연 잘 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두 다리에 무겁게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그냥 뛰는 거지. 그렇게 나는 그날 최선을 다해 10km를 내달렸다.






그래서 어떻게 뛰었냐고 하면.

음. 초반과 후반의 페이스는 20초 차이, 후반에 여실히 지구력이 떨어지는 지금의 상태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제까지는 하지 못했던 (내 기준에서) 엄청난 질주를 해서 피니시 라인으로 들어왔다. 기분이 어찌나 좋던지, 너무 숨이 차 따갑던 가슴의 느낌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그래, 대회란 이런 기분이었지!




해도 안 되는 건가. 한동안 나를 잠식하고 있던 우울한 생각이 안개 걷히듯 싸악 가셨다. 제대로 해보지도 않으면서 욕심만 내는 게 어떤 것인지 저절로 깨우치게 된다. 달리기 선생님, 반성할게요.



이제 마일리지부터 차근차근 늘려보자. 겨울 농사를 잘 지어야 내년 봄을 좀 더 반가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 테니. 오버사이즈의 주황색 티셔츠와 같이 온 의지란 녀석을 붙잡아 어떻게든 같이 잘 가볼 생각이다.



달려라 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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