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커피는

by 심바


그날이 왔다.
인주는 한 동안 신지도 못하고 신발장 한편에 고이 모셔둔 페라가모 구두를 신고 회사로 향했다.
아이를 낳고 난 후부터 구두는 현관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손조차 닿기 어려운 신발장의 제일 높은 칸으로 옮겨졌다. 인주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비싼 구두였기에 소중히 모셔두었다.
오늘은 회사 인사팀에 새롭게 도입된 <업무 적성 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이다. 가용한 육아휴직 기간을 모두 채워 사용한 인주는 앞으로 또 어느 부서에서 일하게 될까 상상하며 집을 나섰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던 그녀에게 그곳은 첫 직장이었으며, 그만두지 않는 한 마지막 직장이 될 곳이었다.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해, 계륵 같은 팀원이 되어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모든 것을 다 잘하면서 특별히 잘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직원이라니... 그 선배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조언인지 다짐인지 모를, 사수였던 선배가 인주에게 해준 얘기가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인주의 회사는 남자 직원들이 많은 남초 회사였다.
그녀가 면접장에서 받았던 질문 중 하나는 '남자 선배가 커피를 타오라고 하면 뭐라고 할 건가요?'였다. 질문을 받자마자 인주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취업스터디에서 준비했던 예상면접질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면접위원을 만족하게 할 만한 우수한 답변이 준비되어 있었고, 입가에 마른침이 고인 중년의 남자 면접위원의 미소에서 인주는 조심스레 합격을 예상했다.
그녀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문서를 만드는 것도, 교육을 받는 것도, 다른 부서와 업무 협의를 하는 것도 인주에게는 도파민 그 자체였다. 10여 년 전, 남자 사수 선배의 엉덩이를 때리며 업무를 독려했다던 볼륨 가득한 헤어스타일의 김본부장은 인주의 롤모델 여선배였다. 그렇게 인주는 매일을 일로 채워 넣으며 회사에서 인맥을 넓혀갔다.
'잠시 옥상에서 커피 한 잔 할래?'
맛도 없는 구내식당의 저녁을 욱여넣고 올라와 자리에 막 앉은 인주에게 메시지가 왔다. 옆 부서 남자 선배였다. 동기들끼리 회식을 하러 간 자리에 가지도 못하고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기획서 때문에 야근을 하고 있는 인주는 잠시 고민하다 '네' 하고 대답했다. 평소 인주에게 친절하게 이것저것 회사일을 알려준 선배였기 때문이다.
'10분만 쉬고 와야지.'
기지개를 켜며 옥상으로 올라갔다.
"준호는 6시 되자마자 신이 나서 칼퇴하던데, 너는 거기 안 가고 뭐 하냐?"
인주의 동기인 준호는 진즉 퇴근하지 못하는 인주의 사무실에 들러 약 올리고 나갔던 터였다.
"제가 지금 거기도 못 가고 옥상에서 선배랑 커피를 마시고 있네요~"
인주는 툴툴거리며 선배에게 시답잖은 농담을 했다.
"선배는 퇴근 안 하고 뭐 하세요? 오늘 그쪽 부서 바쁜 거 끝난 거 같던데."
인주는 시계를 힐끔거리며 선배에게 물었다.
"아, 오늘 와이프가 좀 늦는다고 그래서. 인주 너 클래식 좋아하지?
이거 내가 엄선한 곡들이다! 시간 날 때 들어봐~"
선배는 인주에게 무심한 듯 CD를 건네주었다. 사무실에 있는 네임펜으로 쓴 듯한 글씨로 'To. 못난이'라고 쓰여 있었다.
"에이 선배, 못난이가 뭐예요~"
CD를 받아 든 인주는 머쓱하게 웃었다. 요즘 누가 CD로 음악을 듣는단 말인가. 참 쓸데없는 정성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와이프는 나랑 음악취향이 잘 안 맞더라고~"
선배는 남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인주는 뭐라고 리액션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우물쭈물하다 프리마가 동동 뜬 식어빠진 커피를 털어 넣었다.




인주에게는 그런 일들이 흔했다. 회사에는 여자 선배들보다는 남자 선배들이 많았고, 남자 선배들의 와이프는 대게 그들과 취향이 맞지 않거나 입맛이 맞지 않거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와이프를 깎아내리면서 인주의 취향과 입맛과 시간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인주는 남자친구에게 선배들의 이야기를 시시콜콜하지 않았다. 본인이 관심 없으면 그뿐 괜히 남자친구에게 쓸데없는 오해를 사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한 남자선배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자후배의 남편이 회사로 찾아와 그 선배의 멱살을 잡고 육두문자를 날리는 광경을 목도한 이후로 인주는 남자선배들과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동안 그 사건은 직원들에게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회사 옆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들고 반찬처럼, 안주처럼 두고두고 곱씹는 일이 되었다.
미혼의 여자 신입사원과 바람을 피웠다는 남자 선배, 회식자리에서 여자 부장에게 신체부위의 이름을 섞은 욕을 했다고 소문이 나 좌천당한 남자 부서장, 새벽녘 회사 근처 모텔에서 후배와 같이 나오다 걸린 어떤 남자직원.. 입사 5년 차인 인주는 더 이상 남자 선배와 믹스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뒤꿈치가 까져 밴드에 발갛게 핏물이 어렸다. 인주는 입사를 한 이후 처음 받아보는 <업무 적성 검사>가 은근 기대되기도 했다.
'제너럴리스트가 되려면 이 참에 나에게 맞는 다른 업무도 찾아봐야겠지!'
마치 어제까지도 구두를 신고 다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또각거리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부서는 법을 전공한 직원만 갈 수 있어요."
"인주 씨가 남부장이랑 친하다던데 맞아요?"
"남부장 여기저기 사람 꽂고 다닌다고 하던데 말이야.."
"그 부서는 지금 사람 다 차서 못 가요."
"그래서 이대리가 인사청탁을 한 거예요?"
인주는 점점 얼굴이 붉어졌다. 식은땀이 났고, 목소리가 작아졌다.
무슨 일을 하고 싶냐고 해서 노사팀에 가서 일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인주를 상담하는 장 과장이 그 부서는 관련 전공을 한 직원만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인주가 육아휴직 전에 일했던 부서의 남부장을 걸고넘어진다. 인주가 며칠 전 이제 복직을 앞두고 있다고 인사차 전화를 했는데 거기서부터 뭔가 잘못된 것 같다.
"내가 지금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밖에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인주는 떠밀리다시피 상담실을 빠져나와 인사팀 앞 복도에 섰다. 장 과장이 무슨 얘기를 더 할지 궁금했다. 복도 끝 창가에 선 인주는 그제야 발 뒤꿈치에 붙인 밴드를 바꿔 붙였다. 시계를 얼핏 보았더니 4시 40분이다.
'페라가모야, 네가 고생이 많다..'
인사팀에서 직원이 나오자 인주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꼿꼿이 섰다. 휴직을 한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복도를 지나다니는 직원들의 얼굴이 낯설었다. 언제나 인주에게 도파민을 주던 회사였는데, 까마득히 오래 지난 과거가 된 느낌에 인주는 제3세계에 떨어진 주변인이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인주는 얼굴 없는 그림자가 되어 그 복도에서 1시간 30분을 서있었다. 화장실 한 번. 그 자리를 뜬 시간이라고는 5분 남짓한 그 시간밖에 없었다. 장 부장이 언제 부를까, 급한 일이 아직도 안 끝났나.. 하며 서성이다 보니 어느새 퇴근시간이 지났다. 인사팀에 한번 들어가 볼 법도 했지만 인주는 왠지 자신이 없었다. 하나 둘 퇴근하는 직원들을 보고 아차 싶어 정신이 돌아온 인주는 인사팀 사무실을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안에서 다른 여직원과 시시덕거리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장 과장의 모습을 보았다. 인주의 목 뒤에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아, 없었구나, 바쁜 일.'
인주는 사무실로 들어가 장 과장의 벗겨진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봐요.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아, 그래요. 다음에 봐요."
장 과장은 인주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하고는 다시 옆 여직원과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인주는 또각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복도를 빠져나왔다. 누가 마주칠세라 엘리베이터를 지나 비상계단을 하나하나 천천히 내려갔다. 흐느끼는 소리조차 나지 않은 텅 빈 울음이 인주의 온몸을 채웠다. 처음에는 인주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뭘 잘못했지?'
'욕심이 많았나?'
'전화를 한 게 잘못인가?'
그러나 이내 반성은 분노로 바뀌었다. 장 과장은 인주를 일부러 1시간 반동안 복도에 세워놓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회사를 빠져나온 인주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 수치스러움, 모멸감, 당황스러움 이 모든 것이 눈물에 녹아있었다. 그 순간 인주는 한 아이의 엄마가 아닌, 여성직장인일 뿐이었다.
그때 회사 동기들의 단톡방이 시끄러워졌다. 어두워서 바로 알아보기 힘든 사진이 한 장 올라왔는데, 동기들의 카톡이 순식간에 300을 넘었다. 옷소매로 대충 눈물을 닦은 인주는 눈을 비비며 사진을 확대했다.
사진 속 남자는 바로 장 과장이었다. 옆에 같이 찍힌 여자는 아까 내가 본 인사팀의 그 여직원이었다. 인주는 사진 속 둘의 분위기를 직감적으로 읽었다. 동기들의 카톡은 읽을 필요도 없었다. 인주는 아직 불이 켜진 인사팀 사무실을 올려다보며 전화를 걸었다.


"장 과장님, 커피 한 잔 하실래요?"



* 처음 글쓰기 연습 때 숙제였던 소설 써보기 습작입니다:)

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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