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마라톤 접수기
"이제 춘천마라톤 나가려면 기록이 있어야 한다던데요?"
러닝크루 신년회가 파하는 것을 마저 보지 못하고 아쉽게 돌아오던 밤 11시,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크루원에게서 들은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였다.
지금까지 나의 공식 기록은 작년 1월 동계국제마라톤 32.195km가 최장거리이다. 수족냉증을 타고난 몸으로 그냥 겨울을 나는 것만으로도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겨울, 러닝클래스를 듣고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올 가을에 춘천마라톤 풀코스를 나가보고자 하는 목표 하나였다.
풀코스가 있는 큰 대회들은 대부분 래플(추첨) 방식이거나 거리가 먼 지역에서 열리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그마저도 올봄 대회들은 이미 작년에 접수가 마감된 지 오래. 달리는 것도 힘들지만, 접수는 그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은 이제 공식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접수를 노려볼 수 있는 대회가 춘천마라톤대회일 거라고 해서 그것만 바라보고 겨울 러닝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기록이 있어야 한다니. 그 기록은 대체 어디에서 만든단 말인가.
'경기마라톤 신청하세요. 수원이고 도로통제 대회라 괜찮을 겁니다. 코스가 좀 힘들다고는 하는데 일단 기록부터 만드셔야 하시는 분들은 26일에 신청하세요!'
크루단체방에 글이 올라왔다. 따지고 할 것도 없이 무조건 신청이다. 스케줄 입력도 해두고 당일에 알람까지 여러 개 맞춰두었다. 시나브로 시간이 흘러 신청당일이 되었다.
마라톤 신청이 힘든 이유는 신청자수 대비 부족한 서버환경인 것으로 생각된다. 접수를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없을터. 체감상 신청경쟁은 매년 더 치열해지는 것 같다. 대회들이 점점 래플방식으로 바꾸는 것도 접수를 못한 사람들의 불만이 폭주해서인 것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다. 차라리 뽑기에서 떨어지는 게 덜 속상하다. 선착순으로 신청하면 대부분 접수 시간에 서버가 터지고, 언제 열리나 하염없이 기다리다 종국에는 접수가 마감되었다는 페이지를 마주하게 된다. 대체 그 바늘구멍은 누가 통과하는 건지.
그러나 나는 오늘 이 일련의 과정을 또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경기마라톤 풀코스 신청을 위해서.
'곧 신청이 시작됩니다'
경쾌한 알림 창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오후 2시부터 접수 시작인데 10분 전에 이런 화면이라면 괜찮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해 본다. 1시 58분 새로고침을 누르자 화면은 하얗게 바뀌고 뱅글뱅글 돌아가며 멈춰버렸다. 아, 역시나 또 몰렸구나. 이제부터는 인고의 시간이다.
어쩌다 접속이 되는가 싶더니 대기번호가 503번이란다. 풀코스 접수인원은 1,500명, 전체 접수인원은 10,000명이다. 이렇게 그대로 기다리면 나에게도 희망이?! 하는 순간 연결이 끊겼다는 메시지가 뜬 화면으로 바뀐다. 그러면 그렇지... 세상에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접수가 이미 끝났는데 나만 이러고 있는 건가 싶어 크루 채팅방에도 들락날락하며 계속 새로고침을 눌렀다. 하프로 신청성공했다는 분이 계셨다. 신의 손이다. 아직 접수가 마감된 건 아닌 것 같아 아예 포기하지도 못한 상태로 4시 30분이 되었다. 2시간 30분 동안 나는 흡사 기계와도 같았다. 동글동글 돌아가는 화면을 보다 대기번호가 나오길 기다리고, 더 기다리면 연결이 끊겼다는 안내가 나오고,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새로고침 무한 반복. 그런데 갑자기 지난 두 시간여 동안 보지 못했던 화면이 나왔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정보를 입력하는 손끝이 약간 떨렸다. 이렇게 다 하고 나서 결제단계에서 실패한 대회들도 많았기에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은 상태로 단계를 따라 접수를 진행해 나갔다.
어라?
결. 제. 완. 료.
카카오톡으로 등록안내 메시지가 왔다. 나 성공했나 봐!!!
약 세 달 후 나는 42.195km의 풀코스 마라톤을 뛰어야 한다. 아니, 뛸 수 있다. 어쩌면 뛰어야 할 운명이었을까. 에라모르겠다 정신으로 신청한 러닝클래스 수업을 열심히 들으면 4월엔 그래도 뛰어볼 만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두 손가락으로 집념이 아니라 집착 그 자체였던 접수의 지난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해냈으니, 이젠 두 다리가 열심히 달려줄 차례다. 가을의 전설을 만나기 전에 몸을 먼저 만들어 두겠어.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