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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덕이 Dec 22. 2023

시간당 10만 원이라고요?

첫 심리학 과외

      프리랜서의 삶을 시작한 역사적인 첫 수업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랜서가 아닌, 학생일 때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심리학과 졸업 후, 동 대학교 대학원의 석사 과정 재학 중이었다. 어느 날, 학과 구인 게시판에 파격적인 구인글이 올라왔다. 여의도의 한 투자회사 CEO가 개별 심리학 과외를 원해 개인 과외 선생을 구하고 있는데 시간당 10만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제시한 것이다. 2023년에도 10만 원은 큰돈인데 지금부터 10년 전의 10만 원이라니. 항상 돈에 쪼들리는 대학원생에게 이 금액은 그 어떤 아르바이트에서도 한 번도 벌어보지 못 한 시급이었다. 게시판의 소소한 조회수를 기록하는 다른 구인글과 달리 이 게시글은 조회수가 몇 백 단위였고 당연히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었다. 심리학 과외는 해본 적 없었지만(애초에 심리학 과외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 그 금액을 보고 지원을 안 할 수 없었다. 나름 심리학과도 졸업했고 대학원 재학 중이니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라는 안일함도 있었다. 그 CEO는 원서 과외 진행을 원했는데 학부 때도, 교환학생 때도 원서를 사용했으니 이런 내용을 피력해서 맞춤형 수업을 한다고 해야지!라는 자신감에 부풀어 지원했고 면접 날짜가 잡혔다. 

        면접 장소는 여의도 고층 건물에 위치한 개인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내부에는 크고 멋진 서재가 있었다. 개인 비서로 추정되는 분은 안내를 해주신 뒤 사무실 한편의 본인 자리로 돌아가셨다. 그 넓은 공간에 CEO와 (듣지는 않으셨지만 근접한 거리에 있어 신경은 쓰이는) 비서 분이 있는 상태에서 면접을 진행했다. 이미 여러 명의 면접을 끝마치고 다음 면접도 있다고 이야기하는 CEO에게 젊은 패기로 수업 방식과 사용할 책에 대해 설명했던 것 같다. 짧지 않은 면접 시간 동안 분위기는 좋았지만 워낙 경쟁률이 높아 보여 큰 기대는 하지 않은 채로 돌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존에도 다양한 아르바이트는 해보았지만 전공을 살리는 고액 수업이라는 점이 굉장히 흥분되고 신나 며칠 동안 뿌듯함과 기대감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사실 심리학과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아온 중년 남성이 왜 심리학에 관심 가지고 배우고 싶어 할지 궁금했다. 수업 첫날, 심리학을 배우고 싶은 이유에 대해 여쭤보니 이미 이 분은 기존에 사학을 1:1로 수업받은 경험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인문학에 조예가 깊고 싶은 욕구가 강한 분이었고 그래서 학구열 또한 높았다. 이 말을 듣고 드디어 심리학을 좋아하는 일반인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 수업에 대한 기대가 더 커졌다. 원서도 미리 준비했고 비록 예습은 하지 않으시지만 이렇게 바쁘고 이 정도 돈을 내면 그래도 괜찮은 것 같았다. 암요, 제가 다 준비하고 선생님은 잘 잡숫기만 하면 되죠. 준비는 다 해왔고 이제 잘 설명해서 이 분의 머릿속에 콕콕 박히게 넣어만 드리면 성공적인 수업이 될 테다. 초반 잠깐의 아이스브레이킹을 끝내고 1시간 동안 정말 ‘열강’했다. 요약하고 쉽게 설명하는 자신에 취해있다가 어느 순간 반응이 없어 슬쩍 보니 CEO의 고개가 떨어진 모습이 보였다. 열심히 듣고 계신 거겠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CEO 선생님은, 어느 순간, 영어 원서와 내 강의 어딘가 쯤에서 잠이 든 것이다. 시간당 10만 원을 받는데 졸린 수업을 하다니! 만족하지 않으시면 어떡하지? 이제 짤리는 건가(!) 온갖 생각이 들면서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부드럽게 깨운 후 해당 내용이 어려운 파트긴 하다고 말하면서 넘어가긴 했지만 졸음은 쉬이 물러가지 않았고 그날 수업은 찜찜하게 끝이 났다.


문제. 다음 중 위 수업에서 강사가 잘못한 점을 고르시오.

1)     그림 위주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준비하지 않아 졸린 수업을 한 죄

2)     역동감 넘치는 파워풀하고 생생한 어투와 톤으로 말하지 않고 졸린 수업을 한 죄

3)     학생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원서로 진행해 졸린 수업을 한 죄

4)     쉬는 시간을 제공하지 않고 졸린 수업을 한 죄



        10년 차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는 수강자의 연령대와 과외 시간대를 고려했어야 한다. 수강자는 비전공자인 50대 추정 남성이고 인문학에 관심은 있지만 정말 깊은 내용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이 분은 심리학 수업이 끝나고 나면 다음에는 어떤 과목의 수업을 들을지 이미 생각해 놓은 분이었다. 즉, 과거의 사학, 현재의 심리학, 그리고 미래의 어떤 과목처럼 심리학 또한 본인의 지적 호기심을 적당히 충족하면 지나갈 과목이었던 것이다. 심리학 덕후인 나는 덕후답게 머글(덕후가 아닌 일반인을 지칭하는 용어)이 약간의 미끼를 던지면 옳다구나 하고 덥석 물고는 마치 상대방도 나만큼 덕후일 것으로 착각한다. 그리고 열성적으로 교화하려 노력한다. 그게 나의 착각이라는 것은 지금도 수업을 통해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하지만 덕후의 열정은 쉽게 내려놓기 어려운 것이다.

        또 다른 패인은 수업 시간대가 점심 이후인 평일 오후라는 것이다. 오전에 열심히 근무한 뒤 점심을 먹고 딱 졸리기 쉬운 시간이다. 심지어 수업하는 사람조차 나른함을 느낄 시간이다. 이 분이 가장 생기 있었던 순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였다. 수업을 열심히 집중해서 들으시지만 가장 좋아하던 때는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돌이켜 봐도 본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였다. 당시의 나는 큰돈을 받으니 당연히 풀로 수업을 하는 것이 옳고 이게 돈값하는 것이고 모든 수강자들이 이걸 원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물론 수업료를 받았으니 수업을 책임감 있게 전체 시간을 운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도 우리가 학생이었을 때, 직접 돈을 내고 수업을 신청했을 때, 각종 교육 프로그램과 워크숍을 듣는 청자의 입장일 때를 잠깐 떠올려보자. 배우는 학습자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강사는 제시간에 끝내주는 강사이고 더 좋은 강사는 일찍 끝내주는 강사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학습자를 만나면서 그들에겐 각자의 니즈가 있고 처한 환경이 있음을 경험으로 깨닫게 되었다.         

        당시에는 열심히 가르치는 강사는 맞았지만 수강자의 진정한 욕구는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다. 돈은 모두에게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진리를 어리고 돈이 없는 나는 몰랐다. 내게 10만 원은 큰돈이지만 이 분에게 10만 원은 그리 큰돈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심리학 각 분야의 핵심을 포괄하는 주요 개념과 연구 사례를 언급하고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이 분의 이야기를 들어드렸다면 이 분께 더 만족도가 높은 수업이 되었을 것이다. 심리학은 이 분한테 입시 과목도 아니고 대학원을 갈 것도 아닌데 심리학에 관심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라도 더 알려드리고 싶은 마음에 꼼꼼하게 수업했었다. 그리고 아마 그런 부분이 그분을 잠으로 빠지게 한 것이 아니었을까. 대부분의 시간은 열심히 들으셨지만 사람인지라 소심하고 옹졸한 나의 마음은 아쉬웠던 부분을 오래 기억에 간직한다. 그렇다고 그때 어린 내가 보인 노력과 열정이 헛수고였던 것은 아니다. 원래 진행하기로 한 횟수보다 두 달치의 수업을 추가로 진행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 돌이켜보니 여유가 없었던 스스로에게 약간의 아쉬운 마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원래 처음은 다 그렇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아직까지 첫 수업료를 능가할 개인 수업료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니 사실 그때의 내가 더 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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