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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덕이 Mar 08. 2024

심리학 학점은행제에서 만나는
다양한 학생들

그리고 돈도 떼어 먹혔습니다.

나는 현재 두 군데의 학점은행제(원격평생교육원)에서 운영교수로 재직 중이다.

일단 직함은 운영'교수'인데 

대학원생 때부터 

'교수'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의 느낌이라

호칭이 교수인 것은 간질간질하다.

그렇게 자주 불리지는 않지만

교육원 직원 분들이나 학생들의 문의를 받을 때 

'교수님'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보면

낯설고 빨리 박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잠시 든다.


학생들의 연령대는 천차만별이다. 

20대 초반부터 60대까지 있는 학점은행제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께 '교수님'이라고 불리니 

뭔가 쑥스럽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분들의 과제로, 시험 점수로, 토론 내용으로 그들을 알고 있다.

운영교수의 할 일은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학점은행제에서 운영교수와 수업교수가 나눠진다는 것은 지원하며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운영교수는 석사 이상부터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수업을 녹화하는 수업교수는 박사 이상부터 지원 자격이 주어진다.

수업교수는 수업계획서를 짜고 수업영상을 찍고 수업평가기준, 과제, 평가 항목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강생을 받을 준비가 되면 운영교수를 뽑아 실제 수업이 운영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운영교수의 업무는 수업 내용에 대한 문의, 토론 운영, 과제 채점, 중간/기말고사 채점이 된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며 수업 또한 녹화영상이기에 실시간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는 거의 없다.

주어진 기한 내에 주어진 업무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간/기말고사야 정해진 답안이 있으니 채점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토론과 과제는 가이드라인은 있되 결국 개인이 채점하는 것이기에 주관적 기준이 들어간다.

그리고 3년 차 운영교수인 나는 지금까지 

좋게 말해 순진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과제들을 정말 많이 읽었다.


학점은행제를 하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다양하다.

학사 학위가 없어 취득하려는 목적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고

이미 학점은행제로 딴 학사 학위가 여럿인데

그럼에도 아직 가시지 않은 학구열로 새로운 학위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은퇴 후 제2의 인생, 또는 제3의 인생을 찾으러 온 사람도 있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공부까지 하는 엄청난 워킹맘/대디도 있다.

제각기 다양한 사연들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온 성인 수강생들에 대한 기대는

과제 채점에서 우르르 무너졌다.

이전에 AP 심리학을 배우는 유학생들에 대한 내용을 쓰며 (https://brunch.co.kr/@simduk/14)

청소년들은 자신의 의지로 수업을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적었었다.

생각보다 성인에게서도 의욕제로형 유형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이들이 의욕제로인 걸 알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의 과제 표절률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같은 수업 내에서 서로의 과제를 베끼는 경우도 많았는데 

같은 반이고 채점하는 사람(=나)이 같은데 무슨 생각으로 같은 과제를 냈는지 모르겠다.

참고로 모든 평생교육원 사이트는 카피킬러처럼 표절률이 어느 정도인지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교육원 별로 있는 지침에 따라 표절률이 너무 높은 경우에는 과제를 0점 처리하게 되어있다.

처음에는 엄격하게 채점하다가 그렇게 채점하니 반 평균이 50점도 되지 않아서

이후부터는 훨씬 더 느슨하게 채점한다.

지금은 표절률 절반 이하는 점수를 깎지 않는 수준까지 왔다. 

왜냐하면 표절은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고 

표절을 하지 않거나 덜 했더라도

과제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퀄리티를 채우는 경우가 많지 않아

표절로 점수를 많이 깎으면 이후에 깎을 점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량적 점수를 부여하고 과제에 대한 코멘트를 써야 한다.

너무 짧지 않은 분량의 코멘트를 써야 하는데

솔직히 표절률이 높고 누가 봐도 무성의한 과제에는 인간인지라 정성스러운 코멘트를 적기 힘들다.

다른 운영교수들은 어떤 식으로 코멘트를 적는지 모르겠지만

난 어떻게 해서 이 점수가 나왔는지, 어떤 기준을 충족했고 어떤 기준은 충족하지 못했으며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과제가 될 수 있는지 정도로 코멘트를 작성하는 편이다.

가끔은 이 수강생이 과제 작성에 들인 시간보다 

내가 코멘트를 작성하는 시간이 더 길 것처럼 느껴지는 과제들에 대해서도

행여나 컴플레인이 들어올까 걱정되어 열심히 적는 편이다.

억울하지만 지금 번거로운 게 이후에 컴플레인 들어와서 번거로울 것보다 더 나으니까.

다행히 지금까지 과제로 컴플레인이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작년에는 우수운영교수로 뽑혀

이렇게 해나가면 되는구나라는 자신감도 얻었다.


석사 졸업이지만 이미 학점은행제 반을 운영한 경험이 있고

다른 교육기관들 강의 경험이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생 평생교육원 수업교수로 지원한 적이 있었다.

특이하게 석사 졸업이더라도 실무 경험이 있으면 수업교수 지원 자격이 주어져서

지원했는데 합격했다.

그래서 수업교수는 어떤 일을 하는지 경험해 볼 수 있었는데

매주 수업 교본을 보내야 하는 타이트한 스케줄이어서 지원한 것이 조금은 후회되었다.

열심히 수업계획서와 1~3주 차의 수업 교본, 단원 평가 문제, 과제를 작성해서 보내고

수정사항을 받아 수정해서 보낸 지 한 달째,

연락이 끊겼다.

공식적인 계약서가 있고 엄연히 존재하는 업체였기에

잠깐 기다려달라, 지금 부서가 재배치되어서 새로운 사람이 인수인계를 받고 있다, 곧 연락이 갈 것이다,

이 말만 믿고 몇 개월을 기다렸다.

당연히 그때까지 한 작업에 대한 보수는 받지 못 한 상황이었다.

얼마 뒤, 안타깝게도 해당 과목이 폐강 결정되어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이며

대신 지금까지 한 작업에 대한 정산은 해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진행되지 않는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정산은 해준다고 해서 또 기다렸다.

정산금액이 얼마인지 내부 협의 다시 연락 주겠다던 직원은 이후에도 달간 연락이 없었다.

그동안 보낸 이메일에 대한 답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다시 기다리다 전화를 해보니 

해당 기관은 폐업했으며 

자기들은 새로 인수한 새로운 교육기관이라는 그간의 사정을 들려주는 새로운 직원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기존 회사의 직원들은 모두 해고되었고 

자기들은 기존 회사의 미정산된 금액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인수받았기에 

지금 교수님 같은 분들이 많고 연락이 많이 온다, 이걸 어떻게 할지 내부 검토 중이고 

다시 연락 주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게 반년 전 일이다.


이 일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역시 석사 졸업은 안 뽑던데 뽑는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 괜히 지원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작업을 많이 해놓지 않은 상태여서 내 노력이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위안도 느껴졌다. 

작업을 많이 하지 않았으니 그만큼 정산금액도 크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려 노력했다.

물론, 그래도 불공정한 일에 화가 났다.

하지만 어찌할 바 없어서 무기력함을 느꼈다.

보통 무기력함을 제일 쉽게 해소하는 방법은 스스로를 공격하는 것이다.

공격할 타인이나 외부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스스로에 대한 공격은 괜한 짓 했다는 얼마 간의 자책으로 이어졌다.

'나도 이런 사기를 당하다니!'라는 놀라움도 있었다.

 너무나 공식적인 계약서를 받고 안심한 것도 있었다.

보통 프리랜서는 계약서를 주고받지 않는 경우도 많고 

불공정한 계약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에

계약서 하나만 든든하게 믿고 있었다.

많은 프리랜서들이 계약 이후 공정한 대가를 받지 못한 경우가 아주 많다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경험 없다가 10년 채우고 이제야 한 번 일어났으니 

그것도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투자 실패해서 돈을 날린 적도 있고 사기로 날린 돈도 있지만(생각해 보니 이미 돈을 날린 경험이 많다....)

근로에 대한 대가를 못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학점은행제 수업교수 채용 공고를 찾지 않는다.

학점은행제에서 나의 역할은

지금 이 정도의 역할이 적절해 보인다.

보답받지 못 한 노력이 아직은 내 안에 머물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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