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고등학교에서 심리학을 배운다니.
라떼는을 쓰고 싶지 않지만
정말로 나 때는 고등학교에서 심리학을 배우지 않았다.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심리학 수업이 있다더라를 알게 된 것은 AP 심리학을 가르치면서였고
초창기에는 몇몇 특목고에서 유학반 대상으로 수업이 개설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대중적으로, 유학이 목적이 아닌 일반 고등학생들에게도 심리학이 보급된다는 사실은
나 같은 심리학 전공자에게는 여러 모로 희소식이었다.
학교 2~3개 정도만 잡아도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고
늦어도 평일 4시 정도면 수업이 끝난다.
강사이기 때문에 교사라면 해야 할 행정적인 업무를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
심리학은 다른 교과목 대비 아직까진 공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시간당 페이가 최소 5,000원~10,000원은 더 세다.
다른 교과목은 교직자격증이 필수이지만 심리학 같은 경우에는 교직자격증이 필수가 아닌 곳도 꽤 있다.
아마 심리학 전공생이면서 교직자격증까지 있는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곳으로 보인다.
이렇게 좋은 기회라니!
마침 집 근처에 공고가 났다.
난 학교 근무 경험은 없었지만 급하게 뽑고 있었기에
서류 제출 하루 만에 면접을 보고 채용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서류를 제출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첫 심리학 수업 날이 되었다.
(항상 비슷한 패턴인 것 같은데 뭔가 인생이 이런 느낌이다)
나는 2년 동안 한 고등학교에서 심리학 수업을 했다.
심리학 수업 대상은 두 종류로
1) 고등학교 3학년 대상 교양 수업
2) 심리학 수업을 듣길 희망하는 다양한 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진행되는 교양 수업(이 때는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행)이다.
나는 1번 대상, 즉 고등학교 3학년 중 심리학을 선택교양으로 선택한 학생들에게 수업을 진행했다.
2번 대상은 해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
교육대학원 재학 시 동기 선생님 중 한 명이 2번 대상을 상대로 수업했다고 들었다.
학생들이 심리학 수업을 듣고 싶어 했기에 의욕과 참여도도 좋았고
수업 준비는 힘들었지만 소수여서 더 좋았다는 동기 선생님의 코멘트를 기억하는지라
첫 수업 때 의욕 만땅이었다.
나는 선택지조차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이제는 선택지가 있고 그 선택지 중 심리학을 선택했으니
고등학생 때의 나처럼 심리학을 전공으로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5년간 군무원 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했고 각종 개인 수업도 많이 했었기에 수업에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첫 수업을 했다.
그리고 망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전엔 주로 성인 대상 수업이었기에
10대 청소년을 만나는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AP 수업을 하면서 고등학생들을 만나긴 했지만
1:1 형식으로 진행되는 수업과 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수업,
사교육과 공교육 현장에서의 수업은 느낌이 매우 달랐다.
첫 수업은 2022년으로
코로나로 인한 공백기가 조금씩 끝나가면서
이제 막 학생들이 학교로 복귀하는 시점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데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니는 것이 처음인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친하지도 않았고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매우 낯설었다.
무엇보다 하루에 7~8교시를 앉아서 오프라인 수업을 듣는다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힘든데 갑자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압박적이라는 고3 지위를 획득하다니.
그 힘듦은 수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도 무기력, 무관심, 귀찮음, 피곤함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교사로 학교라는 공간을 처음 겪는 내게 이건 난이도 Lv.99의 매우 생소하고 힘든 경험이었다.
내가 겪은 전형적인 고등학교 심리학 수업의 하루는 다음과 같다:
예) 9시 입실: 1교시일수록 학생들이 아직 자고 있다. 교사가 입실해도 학생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담임교사가 어떻게 아침 종례를 하셨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인사를 해도 인사를 하는 학생들은 한둘 정도다. 일단 출석은 불러야 하니 출석을 부른다. 아이들이 부스스 일어나 대답하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9시 15분: 수업을 시작한 지 15분 정도 지나면 이미 절반이 자고 있거나 핸드폰을 하고 있다. 2022년만 하더라도 핸드폰을 수거하지 못했었고 학생들한테 일어나거나 핸드폰을 집어넣으라고 해도 그때뿐이다.
9시 50분: 다음 수업을 두려워하면서 퇴실.
10시: 반복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했다.
이게 정말 나한테만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그럼 내부 귀인을 해야 한다. 뭔가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거니까)
아니면 원래 고등학교 교실의 현실은 이런 것인지(그럼 외부 귀인을 하고 좀 더 마음 편히 있어야 한다)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일단 학교에 심리학 강사는 오직 1명(=나)이기에 같은 과목 선생님들 중 물어볼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과목 강사 선생님들과 친해지면서
수업은 좀 어떤지, 학생들은 잘 듣는지 등을 물어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학생들이 열심히 들어서 기특하다던지,
다들 눈을 반짝인다던지 등을 말하는 선생님은
그 해나 다음 해나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이를 나름의 방식으로 타개해 나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포기한 분도 계셨고 더 크게 목소리를 키우시는 분도 있었고 여러 활동을 접목하려는 분들도 있었다.
아무리 상황적 요소가 암담할지라도
성취지향적이고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한 데다 타인의 평가라는 외부 통제 요소에
휘말리는 나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수업을 그만둘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수업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했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있다.
첫 해 수업 시작 후 3주 만에 극도로 우울해져서 개인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서울에 살고 있다면 서울시 청년 마음건강 지원사업을 강추한다. 2022년과 2023년 모두 고등학교 근무로 인한 우울과 스트레스로 상담을 받았으며 전액 무료다.) 상담을 받으며 수업의 성공 여부를 학생들의 반응이 아닌 스스로의 내적 평가에 두려고 노력했다.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도 노력하고 있는 영역이다.
첫 학기가 끝나고 강사로서 스킬을 높이기 위해 강사 워크숍에 참여했다.
기존에 만들던 PPT 방식을 대폭 수정하고 많은 활동을 넣어 참여형 수업으로 만들려 노력했다 (수업 예시 영상)
우울감을 승화하기 위해 어려움을 공유하는 영상을 만들었다.
활동을 할 때는 최대한 많은 학생들과 소통하고 이야기하려 노력했다.
2022년에 날 만난 가족들과 친구들은 내가 이 수업으로 얼마나 우울하고 힘들어했는지 알 것이다.
첫 해가 끝나고 학교 측으로부터 계약 연장 제의를 받았다.
나는 죽을 것 같이 힘들었지만
학생들의 수업평가(학교에서 실시하는 것과 수업이 끝난 후 내가 자체적으로 실시한 것 모두)는 호평이었다.
제의를 수락할지 말지 무척 고민이 되었지만
힘들게 만들어 놓은 피피티를 한 번만 쓰는 것도 아깝고
두 번째 해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OK 했다.
두 번째 해에는 다음과 같은 성과가 있었다.
3월 셋째 주에 상담을 받은 첫 해 대비 9월까지 상담을 안 받고 버틸 수 있었다.
첫 해에 만들어놓은 피피티를 수정하면서 수업했기에
수업 준비 시간은 덜 걸리면서 더 양질의 수업을 할 수 있었다.
12월에 다시 계약 연장 제의를 받았고
수업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많아져서 새로 반이 추가되었으며 시간도 늘고 페이도 올랐다!
이후 스케줄 조정 단계에서
학교 측에서 초반에 수용가능하다고 했던 내 스케줄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나는 다른 학교와도 스케줄 조정을 해야 했기에 기존에 말한 스케줄 외 새로운 스케줄로는 근무하기 어려워 아쉽게도 더 나은 조건이 된 고등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금전적으로는 좀 더 아쉬워지고 불안정해졌지만
원래라면 3월 새 학기를 두려워하며 2월부터 우울했을 텐데
2월이 지나고 3월이 와도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이전에 상담받을 때 상담 선생님들이 이야기하신
이 고등학교 수업을 붙잡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놔주지 못하는지에 대해 잘 살펴보라는 말이 조금 더 이해가 갔다.
고등학교 수업이 맞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으며
안 맞는다고 해서 더 나약한 것이 아니다.
같은 사람도 지금은 견딜 수 있지만
미래에는 못 견딜 수도 있다.
고등학교 수업을 하면서 수업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좀 더 어린 연령대나 성인을 대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수업 도중 활동을 할 때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이
굉장히 흥미롭고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 상담자 경험을 더 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는 관심 없던 시각적 자료 제공 방식이나 PPT 스킬에
흥미가 가고 더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수업은 이런 면에서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내년, 아니면 그 이후에도 다시 돌아갈 수도,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또는 정규 수업이 아닌 일회성 수업으로 찾아갈 수도 있다.
새로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는 언제든지 필요할 때 돌아갈 수 있는, 힘들지만 든든한 경험을 하나 더 축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