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덕이 Mar 22. 2024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초등상담

햇수로 3년째 한 초등학교에서 상담을 하고 있다.

처음에 면접을 본 학교에서 여전히 근무 중이다.

교육대학원을 졸업했으니 전문상담교사 자격증은 있지만

임용을 보지 않았으며 기간제로 근무하는 것도 아니다.

왠지 풀타임이 아니라 스스로를 '교사'라고 부르기는 민망해서

보통은 초등학교에서 상담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초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직업을 소개할 기회가 있어

초등학교에서 상담한다고 했더니

(프리랜서로 하고 있는 일이 여러 가지이니 

보통 사람들이 제일 이해할법한 직업으로 골라 말하는 편이다. 특히 한 번 보고 말 사이에서는 더더욱.)

초등학교에서 무슨 상담이냐는 질문을 들었다.

고등학교 강사로 근무할 때도 다른 강사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들은지라

초등학교에서 상담 업무란 아직도 낯선 일인가 싶었다.

대학원 동기들을 만나면 상담 이야기 밖에 안 하고

주변에 상담에 친숙한 사람이 많아서인지

사람들에게 익숙한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나만의 심리학/상담 어항에 살고 있는 느낌이다.

강사 중 한 분은 초등학생 자녀가 있음에도 초등학교 상담이 낯설다는 듯이 이야기해서

해당 학교는 상담(교)사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 분이 관심이 없는 것인지 궁금했다.


초등/중/고등학교에는 학교 별 상담(교)사 1명을 배치하게 되어있지만

많은 사립학교에는 의무적이지는 않다.

공립도 상담 교사가 있을 때도 있고 상담사가 있을 때도 있다.

그리고 내가 현재 출근하는 학교처럼 일주일에 15시간 미만의 초단기 상담(교)사, 또는 순회 상담사를 두는 경우도 있다.

나야 여러 업무와 병행하기에는 오히려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아서 처음부터 임용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 동기들은 많이들 임용을 보거나 기간제 풀타임으로 근무한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5건의 케이스를 연달아 보고

가끔 응급 상담이나 집단 교육이 필요한 경우에는 시간이 맞다면 진행한다.

내년에는 기간제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도 마음에 들고 

하고 있는 업무들을 정리하는 것이 아직은 아쉬워서 

일주일 하루 상담으로 진행 중이다. 

그래도 상담은 내가 하는 일 중 가장 즐거운 일이라 더 늘리고 싶어

올 해는 학습상담으로 범위를 넓혀 다른 학교에서도 할 예정이다.


지금은 이렇게 초등 상담을 찬양하지만

처음에는 초등 상담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다.

대학원 때 대학교 상담센터에서 실습을 하며 

성인 대상으로 언어상담을 하는 것이 내 성향에 맞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선호하는 상담 이론인 CBT/DBT는

어느 정도 인지적 발달이 이루어진, 최소한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을 타깃으로 할 때 효과가 가장 좋았기에

언어적 발달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초등학생들에게는 상담 진행이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교사자격증은 땄지만 바로 학교로 갈 생각은 없었고

학교를 간다고 해도 고등학교로 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첫 학교를 초등학교로 택한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상담을 시작한 이유는 고등학교에서 심리학 강사로 일한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고등학교에서 심리학 강사로 근무하며

나는 고등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은 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좀 더 생기발랄하고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이 적고 활력이 있는 학생들을 만나고 싶었다.

고등학교 말고 다른 학교를 가고 싶다 생각하던 와중

초등학교에서 초단기 근로자로 상담사를 채용하는 공고를 보았다.

중/고등학교는 이런 식의 공고가 잘 안 나오는데

초등은 은근 자주 나와서 한 번 해보고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게 초등학교에서의 시작이었다.


지금 다시 고르라고 한다면 항상 초등을 고를 것이다.

초등학교의 상담 업무는 

힘들고 지치는 고등학교 강사 생활과 군무원 학원의 강사 생활을 견디게 해 주었다.

초등 상담이 귀여운 아이들이 있어서라던지,

아기자기한 느낌이라던지,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어주고 우쭈쭈 해주기만 하면 되는 쉬운 시간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 위의 이야기는 직접 들은 다른 사람들의 코멘트다. 

애들이 무슨 고민이 있냐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해당 이야기는 중학생과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부모의 이야기였다.)


일주일에 하루만 진행되는 상담이기에

보통은 담임교사 또는 학교 전체 차원에서 의뢰되는 상담을 진행한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악명 높은(?)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여서 심리적 안정이 필요한 학생도 있었고

학교폭력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연달아서(!)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원래는 이렇게 진행되면 안 되지만 쉬는 시간 없이 상담이 진행되는지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교차할 뻔한 적도 있었다. 

학교에서는 여기까지 생각 못 하고 상담을 배정한 것 같았다. 

최대한 먼저 상담하는 학생을 조금 일찍 보내 서로 마주치지 않게 했었다.)

ADHD를 가지고 있는 학생도 있었고 

ADHD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부모가 검사를 거부하고 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발달장애가 있는 걸로 보여 의뢰된 학생도 있었으며

전체 학년에서 모든 학생들이 싫어하고 담임교사도 힘들어하여 

의뢰서 A4 한 페이지가 그 학생이 한 온갖 행동들로 꽉 채워진 경우도 있었다.

어떤 경우던지 귀여운 초등학생, 쉬운 상담, 과자나 먹고 보드게임이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말을 하지 않는 아이, 

이미 수차례 상담을 겪고 상담자에 대한 불신이 높은 아이, 

상담자를 통제하고 싶은 아이, 

분노를 조절하기 힘들어하는 아이 등이 내가 근 2년간 만난 아이들이었다.


자격증을 딴 후 내 첫 실전 상담이었다.

초등학생들을 언어적 상담만으로 40분을 채운다는 건 발달 수준과 연령을 고려하면 거의 불가능한 과제였다.

많은 매체들을 찾아보고 책을 읽고 미국의 학교 상담 사례들을 참고했다.

각 내담자들이 가지고 있는 주호소 문제, 학년, 특성을 고려하여 

매 시간 다른 활동과 프린트를 준비했다.

하루에 5건을 진행하면 5회기 모두 다 다른 내용을 진행한다는 뜻이다.

나는 쉬는 시간이 없었기에

학교에 도착하기 전에 시간대별로 필요한 활동지나 준비물은 내 폴더에 순서대로 쌓여 있었다.

상담실이 없는 학교여서 창고 같은 곳 또는 교사 휴게실에서 진행됐으며

당연히 상담 교구도 없어 창의력을 발휘하여 내가 직접 만들거나 아니면 내 돈으로 사야 했다.

상담을 하는 시간보다 준비 시간이 더 길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대학원 때 배운 내용은 초등학생에게 맞춰서 수정되어야 했다. 

학교에서 받을 수 있는 자원도 거의 없고(정규직이 아니니까)

맨 땅에 헤딩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들이고

어떤 경우에는 충분히 왜 그런지 알 수 있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고 매시간마다 마음을 다하니 

한 명 한 명의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초기에는 상담 목표에 맞게 준비한 내용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어느새 진도처럼 느껴져 상담 시간이 부담된 적도 많았다.

그때는 학생들이 뜻대로 응하지 않으면 조바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아이들이 마주하는 상담실 밖의 현실과 내가 있는 상담실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흐름대로, 하지만 큰 주제는 다룰 수 있도록, 

아이들의 흐름에서 주제를 뽑아내고 욕심을 내려놓으니

아이들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이 행동에서 보였다.

그리고 그때 진정한 유대감이 생겼다.


활동을 계획하는 것도,

프린트물을 찾고 커스터마이징 하는 것도,

상담이 어떻게 흘러갈지 상상해 보는 것도

모두 나에게 참 즐거운 일이다.

내담자인 학생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그 이야기 속에 흩어져있는 감정의 파편과

정말 원하는 욕구의 실마리를 찾아

그 사람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흥미롭다.

내가 받지 못 한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을

나만의 이타주의 적응기제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은

스스로를 수양하는 기분이다.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초등학교에서 상담을 시작한 것은 꽤나 행운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첫 해의 상담이 좋은 평가를 받아 그다음 해에도, 그리고 올 해까지로 연장된 것도

참 감사할 일이다.


올 해의 상담이 이번 주부터 시작되었다.

재작년과 작년의 아이들은 스스로의 여행을 다시 떠났고

이제 새로운 5명의 아이들과 함께 학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미 첫 회기부터 각양각색의 다양한 아이들이 다른 모습을 벌써부터 물씬 보여준 덕분에

시간이 훅 지나간 느낌이었다.

학생들과 함께 할 올 해도 기대된다.

학생들도, 나도 모두 인간적 성장을 1mm를 하는 한 해를 기대한다.

이전 14화 고등학교에서 심리학을 배운다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